'신병 양성의 요람' 육군훈련소가 관광 상품으로?
오는 11월 1일이면 육군훈련소가 창설 71주년을 맞게 됩니다. 지난 1951년 '제2훈련소'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이래, 연간 12만 명에 이르는 청년들이 이 육군훈련소에서 교육훈련을 받으면서 대한민국을 지키는 군인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충남 논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로 훈련병들이 양성되는 이곳 육군훈련소를 꼽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7일, 논산시에서 공개한 보도자료 한 건이 논란이 됐습니다. 제목은 "논산시-육군훈련소 안보ㆍ관광 상생발전 업무 협약 체결". 논산시청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보도자료의 문구 몇 대목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논산시-육군훈련소 안보ㆍ관광 상생발전 업무 협약 체결! '새 역사'썼다
전국 어디에도 없는 '병영 체험형' 이색 투어가 논산에서 열린다
'미래 살 거리' 만드는 관광 인프라 조성에 상생ㆍ동행 약속
간단히 요약하면, 논산시와 육군훈련소가 업무협약을 맺고, '육군훈련소 안보·관광 투어'를 개발해서 훈련소를 찾는 관광객과 입소 장병 가족들에게 다양한 병영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부대 내 개방된 공간을 견학하거나 관람하는 식의 '병영 체험형' 관광 상품도 만들어질 전망이라고 합니다.백성현 논산시장은 이번 업무협약이 지자체와 군이 함께 지역 발전을 이뤄가는 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보도자료 내 발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백성현 논산시장은 "오늘의 이 자리는 지역의 관광 활성화를 도모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군과 우리 논산이 하나 되어 충남 남부권의 미래 살 거리를 만들고자 합심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며 "논산시와 육군훈련소가 새로운 역사를 쓴 날"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이례적인 '육군훈련소 안보·관광 투어'의 대상이 될 육군훈련소 측의 반응도 궁금해집니다. 병역 자원이 감소하며 훈련소 내 일부 공간이 유휴 공간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신병 교육훈련이 이뤄지는 훈련소를 선뜻 공개하는 것이 녹록하지 않아보이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내용 역시 논산시 보도자료에 담긴 박원호 육군훈련소장의 발언입니다.박원호 육군훈련소장은 "논산시민들은 여러 국방 시설을 오랜 시간 품어 지내 온 대한민국 국군의 동반자이자 애국자이기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며 "지속적인 상호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지역사회와의 상생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협약사항을 내실 있게 추진해 가겠다"고 말했다.
논산시는 향후 관광 수요와 특성 파악을 위한 조사를 하는 한편, 시범 운영 등을 통해 양질의 관광 인프라 조성에 속도를 높일 계획이라고 합니다.
훈련병 부모들 "땀 흘려가며 훈련 받는 곳이 관광지냐" 격앙‥현역 군인들도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런 사실이 언론 보도 등으로 알려지자, 육군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들의 부모들부터 강력히 반발하고 있습니다. '어이가 없다', '육군훈련소를 관광 상품으로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반응입니다. 회원 수 7만3천여 명 규모인 네이버 카페, '군인아들 부모님카페'에 올라온 훈련병 부모님들의 게시글과 댓글을 일부 인용하겠습니다.
아들들 한창 젊고 꽃다운 나이에 군대에서 2년 여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속상한데‥ 아들들이 땀 흘려가며 훈련 받고 있는 곳을 관광지로 하다니.
당사자들에게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이고, 아닌 사람들에게는 잠깐 1회 체험 상품인가요?
논산 관광화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다고 힘들게 훈련하는 훈련병들을 동물 관람하듯이 보여준다는 게 말이 됩니까?
현역 군인들에게 이런 '육군훈련소 관광상품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물어봤습니다. 대부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군인을 희화화하는 것 아니냐는 격한 반응도 일부 있었습니다. 훈련병 당사자들의 의견은 미처 들어보지 못했지만, 본인들이 받는 교육훈련 장면을 누군가가 구경하듯 쳐다보고 관람한다면 그리 기분이 유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한 발 물러선 논산시와 육군‥"업무 협약만 맺은 단계,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번 논란에 대해 논산시청은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보도자료에 적힌 대로 '병영 체험형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것이 맞냐'고도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아직 업무 협약만 맺은 상황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할지는 향후 검토해봐야 알 수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다만 논산 주변에 있는 다른 관광지와 연계한 '안보 체험형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방안이 고려될 수 있다고도 설명했습니다.
육군 역시 "지역 주민들과의 상생이라는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 협약을 체결했고,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협력하기로 한 것"이라고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습니다. "현재까지 별도의 구체적인 사업 계획에 대해서는 논의한 바 없고, 일부 언론에서 보도된 것처럼 '훈련병을 상품화'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교육훈련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코로나19 종료 이후 충분한 검토 후 제한적으로 시행할 것이라고 밝혀 여지를 남겼습니다.
육군은 이번 업무 협약 체결과 관련해, 박원호 육군훈련소장이 육군본부나 박정환 육군참모총장에게 이같은 사실을 보고하거나 상의하지 않았는지 묻는 기자 질문에는 "지자체 등과의 업무협약은 사·여단급 이상 부대가 자체 예규에 의해 시행토록 규정에 명시돼 있다"고만 답했습니다. 다시 말해 보고 없이 업무 협약을 맺어도 규정상 문제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지방자치단체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는 차원에서, 군을 지역 여건과 연계해 업무협약을 맺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만은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국민 모두가 병역의 의무를 갖는 '국민개병제'를 채택한 나라에서, "'병영 체험형' 이색 투어"라고 이름 붙이면서까지 훈련소를 상대로 한 관광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조금 더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 자료 출처: 논산시청 홈페이지, 네이버 카페 '군인아들 부모님카페' **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