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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유해, 소나무관에 안치" 당시 중국 보도 공개

"안중근 의사 유해, 소나무관에 안치" 당시 중국 보도 공개
입력 2022-10-26 16:33 | 수정 2022-10-2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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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 유해, 소나무관에 안치" 당시 중국 보도 공개
    "안중근 의사 유해, 하얼빈산 소나무관에 안치한 뒤 공동묘지 매장"
    "안중근 의사 유해, 소나무관에 안치" 당시 중국 보도 공개

    안중근 의사 사진 (독립기념관)_국가보훈처 제공

    오늘(26일)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의거' 11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의거 직후 러시아군에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여순(뤼순) 일본 감옥으로 이송됐고,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 받은 뒤 3월 26일 순국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안 의사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형된 여순 감옥의 공동묘지가 유력한 매장지로 추정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발굴 등에 이렇다할 진척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국가보훈처는 안중근 의사의 순국 당시 상황이 담긴 중국 현지 신문기사를 발굴했다고 밝혔습니다. 해당 자료는 국가보훈처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이 독립유공자 발굴 포상에 필요한 자료 수집을 위해, 독립운동 관련 기사 3만 3천여 매를 발췌·분석하는 과정에서 확인됐습니다.
    "안중근 의사 유해, 소나무관에 안치" 당시 중국 보도 공개

    안중근 사망 이후 이야기 (성경시보 1910.3.30)_국가보훈처 제공

    중국 만주 지역에서 발행됐던 신문인 '성경시보'는, 안중근 의사 순국 나흘 뒤인 1910년 3월 30일에 보도한 기사에서 "일본 당국이 (안 의사의) 유해는 다른 사형수와 동일하게 감옥이 관리하는 사형수 공동묘지에 매장될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전했습니다. 특히 기사에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 지사가 감옥 관리자에게 부탁한 끝에 "하얼빈 소나무로 만든 관에 유해를 안치하고, 조선 풍속에 따라 관 위에 흰 천을 씌우도록 했다"는 등의 당시 정황도 담겼습니다. (아래 내용은 중국 기사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안중근의 둘째 동생은 안중근 처형 집행 이전에 당국을 향해 유해를 한국 원적지에 옮겨 매장할 수 있도록 간절히 요청했다. 이에 당국에서는 부득이 규정을 내세워 사형수의 유해는 감옥이 관리하고 있는 사형수 공동묘지에 매장한다고 답했다. 안중근의 둘째 동생은 곧바로 안중근과 일정한 친분관계가 있는 전옥(典獄, 감옥 관리자)에게 부탁했다. 전옥은 고심 끝에 둘째 동생에게 파격적으로 하얼빈의 소나무로 만든 관으로 유해를 안치하고 조선 풍속에 따라 백포(흰 천)를 씌우도록 허락하여 한국의 풍속을 따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일반 사형수와는 다른 규정을 적용하여 해당 영구를 감옥 내 교회당에 안치한 다음 우덕순 이하 3명의 죄수들에게 안중근의 영구에 고별식을 갖도록 했다. 우덕순 등 3명의 죄수들은 안중근의 영구 앞에서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하고 조선인의 예법에 따라 땅에 꿇어앉아 두 번 절을 했다. ‥(하략)‥

    국가보훈처는 "여순 감옥이 있는 중국 만주 현지에서 당시에 이를 보도한 기사를 처음으로 발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전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관련 연구 권위자인 오영섭 박사는 "안 의사의 관을 하얼빈산 소나무로 제작했다는 내용은 처음 밝혀진 귀중한 사실"이라며 "안 의사의 유해 찾기에 있어 작지만 유익한 단서를 얻은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모친 장례도 상하이 교민들이 사회장으로 치러"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의 행적이 담긴 중국 현지 신문기사도 이번 작업 과정에서 처음 공개됐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됐던 신문인 '민국일보'의 1927년 7월 19일자 기사로, 조마리아 여사의 생전 독립운동 활동 내용을 전하는 한편 상하이 교민들이 여사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렀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중국 기사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안중근 의사 유해, 소나무관에 안치" 당시 중국 보도 공개

    안중근 모친 사회장 거행 (민국일보 1927.7.19)_국가보훈처 제공

    1909년에 하얼빈에서 나라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의사 안중근씨는 그 다음 해에 여순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친동생 등이 그의 유해로 장례를 치르고자 했으나, 일본 관리들이 그 유해를 강탈하고 내주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중근의 모친 조 씨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두 아들 정근과 공근 둘을 데리고 조국을 떠나 북러시아 영토로 이주하여 십 수년의 세월에 걸쳐 꾸준히 애국 사업에 노력했다. 이후 1919년에 한국에서 3.1 독립운동이 발생하자 조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상하이로 와 광복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올해 봄에 뜻밖에 병에 걸려 영국 조계지의 덕국의원(德國醫院)에 입원해 몇 개월간 치료받았으나 큰 효과가 없어 7월 15일 오후 11시에 서거하시니 향년 66세였다. 상하이의 한국 교포들도 그녀의 평생 사업을 추모하여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특별히 사회장을 거행하여 19일에 발인하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 연구 권위자인 박 환 수원대 교수는 "그동안 상하이 한인교민단 교민장으로 치러진 것으로 알려진 조마리아 여사의 장례식이 그보다 높은 예우인 사회장으로 치러졌다는 점이 새롭게 확인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안중근 의사의 순국 관련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해, 유해 발굴이 조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보훈처는 또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위해 중국 정부와 지속적으로 협의를 진행하고 있고, 정확한 매장지 파악을 위해 관련 국가의 주요 문서보관소 등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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