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복사판?
우크라이나 전쟁의 개전 초기인 20일 동안에만 러시아군은 7천 명을 잃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러시아군 사망자는 1만 5천 명, 장성을 포함한 지휘관은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숫자인 15명을 잃었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애초 푸틴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거란 전망의 근거 중 하나는 현실적으로 우크라이나 점령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었죠. 우크라이나 침공은 소련의 붕괴를 촉진했던 40여 년 전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비슷한 결과를 가져올 거란 예상이었습니다.
쌍둥이처럼 닮은 두 전쟁
우크라이나 침공과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닮은 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도 지금 러시아에 우크라이나가 그렇듯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소련의 두려움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에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손쉽게 진압할 수 있을 거라고 봤습니다.
전쟁을 결정하기 전 소련의 KGB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핵미사일로 소련을 포위하기 위한 기지로 사용하려 한다는 잘못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이런 식으로 미국의 영향 아래에 들어가면,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국가들에게도 연쇄적인 효과를 끼칠 수 있으니 이런 사태를 막겠다며 신속하게 군사작전을 하려 했던 게 전면전으로 이어졌고, 결국 전쟁은 10년을 끌었습니다.
러시아 정보당국이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푸틴에게 잘못된 정보를 준 것이 침공으로 이어졌을 거라는 보도가 나오는 지금의 상황과 놀랍게 닮아 있습니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분열돼서 효과적인 대응을 못 할 거라는 예측은 당시에도 완전히 어긋났습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개전 몇 주 만에 파키스탄, 중국, 이집트, 영국 등과 동맹을 구성하고 80년 모스크바 올림픽도 보이콧 하면서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소련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한 미국이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진 못할 거라고 판단했고, 여기엔 민주당 카터 대통령의 유약한 이미지도 한 몫을 했습니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허둥지둥 철수하게 하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만만한' 이미지를 주게 된 것과도 닮아있습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저항 세력인 무자히딘에 무기를 지원했고 당시 그 유명한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을 등에 업고 대 소련 저항전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나마 우크라이나보다는 나았던 아프가니스탄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초기 전황은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보다는 훨씬 소련에 유리했습니다.
소련군은 초기에 수도 카불의 전략 지점을 확보했고 지도자와 그의 세력을 암살하고 그 자리에 소련의 꼭두각시를 앉히는데도 성공했습니다.
동부 잘랄라바드나 남부 칸다하르 같은 주요 도시를 확보하고 바그람 공군 기지도 점령한 소련군은 몇 주 만에 아프가니스탄을 통제했습니다.
수도 키이우에서 피해만 입고 있고, 개전 한 달이 넘도록 주요 도시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전황보다는 그나마 나았던 거죠.
비극과 피해만 초래했던 아프가니스탄 침공
그런데도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내부의 저항에 부딪히면서 10년을 끌었고 엄청난 비극만을 초래했습니다.
10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인이 사망하는 등 사상자는 250만 명에 달했고, 3백만 명의 국외 난민을 포함해 엄청난 수의 국내외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소련군도 2만 5천 명 가까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소련은 결국 수많은 무고한 인명만 살상하고, 스스로도 막대한 손해만 입은 끝에 개전 10년 뒤인 1989년 2월, 철군을 결정했습니다.
소련의 붕괴로 이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 패배
이 전쟁은 역사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89년 5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중추국인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열어줘서 동독인 수백 명이 서독으로 탈출하게 됐고, 다음 달인 6월엔 바웬사가 등장한 폴란드가 탈 공산화하며 민주화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체코와 루마니아도 소련과의 결별을 선언합니다.
91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이를 계기로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됩니다.
이 모든 것을 동독에서 지켜봤던 젊은 KGB 요원 푸틴은 소련의 붕괴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비극"이라고 말할 정도로 소련의 붕괴 과정은 그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줬습니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푸틴이 러시아 제국의 재건을 꿈꾸면서 우크라이나를 미국의 영향권에서 빼내겠다며 30여 년 뒤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점도 아이러니합니다.
'아프가니스탄화' 될 가능성 높은 우크라이나
이런 푸틴이 그로즈니나 시리아에서 했던 무자비한 군사작전을 되풀이한다면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국민 3명 중 1명이 사상자가 되고 난민이 됐던 비극이 결국 우크라이나에서도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지금으로선 가능성도 낮아 보이지만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비롯한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를 점령한다고 해도 문제는 그때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의 저항 세력은 투쟁을 계속해 나갈 것이고 결국 러시아는 소련이 과거 아프가니스탄에서 겪었던 일을 우크라이나에서도 또다시 겪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서유럽 크기의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고, 인구도 아프가니스탄의 2배나 됩니다.
나토 회원국인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바다를 갖고 있어서, 육지에 고립된 아프가니스탄과 비교하면 저항군이 보급과 지원을 받기에도 훨씬 유리하죠. 우크라이나 인구 4천만 명 중 1천만 명, 4명 중 1명이 난민이 됐으니 이들이 결국 저항군이 돼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배후에서 지원했던 미국이 지금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나쁘진 않을 겁니다.
푸틴은 어떻게 하든 우크라이나에서 모양을 갖추며 빠져나오는 출구 전략을 찾으려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든, 철군하든 러시아와 푸틴의 입지는 예전과는 같지 않을 테고, 결국 이런 상황은 예기치 못한 거대한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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