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온라인판에 피곤에 지쳐 눈을 붙이고 있는 중년 남성의 사진이 올라 왔습니다. '한국은 잠 못자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을까'(SOUTH KOREA: why so many struggle to sleep) 란 기사였는데요. 대부분의 신문이 이 기사를 번역해 보도할 만큼 의미있는 기사였죠. 저도 좋은 기사라고 생각해 BBC 사이트를 더 찾아 보니 두 달전 BBC 유튜브 영어 학습 코너인 'BBC 6 MINUTES ENGLISH'에 올라온 내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KOREA SLEEPLESS'로 검색하니 똑같은 내용이 지난 12월4일 BBC 라디오에서도 방송됐습니다. 같은 기자가 같은 내용, 같은 인터뷰로 취재한 똑같은 기사를 플랫폼을 바꿔가며 두 달 간격으로 연속 보도하고 있는 겁니다. BBC는 왜 이렇게 한국인의 잠에 관심이 많은 걸까요?
라디오-영어 교재-온라인판으로 이어지는 BBC의 "한국인 수면량 세계 최하위"
영국 BBC 방송은 4월6일 '남한이 세계에서 가장 수면량이 적은 나라 중 하나'라며 잠 못 자는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심층 기사를 내 보냈습니다. 'CHLOE HADJIMATHEOU'라는 이름의 기자가 쓴 이 기사를 통해 "한국은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과로와 스트레스 수면부족에 시달리게 됐다"고 분석했습니다. 수면 클릭닉 전문의 인터뷰를 통해 "수면제를 하루에 20알까지 먹은 환자도 있는데 한국인들은 빨리 자고 싶어 수면제를 먹는다"는 진단도 덧붙였습니다. 공식 통계는 없지만 한국인 10만 명이 수면제에 중독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 기사는 지난 2월 'BBC 6분 영어'에 'Sleepy in south KOREA'란 제목으로 올라온 학습내용이었습니다. 전 세계에 영국식 영어를 무료로 가르쳐 준다는 프로그램. 왜 굳이 '졸린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스트레스 많이 받고 우울하다'는 내용을 들으며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 건 지 선뜻 납득이 가진 않습니다.
강남 수면 전문의도 온라인판에 인터뷰한 같은 의사, 과로에 시달리는 여성 직장인의 사례도 이름이 'ji-an'인데 온라인판은 'ji-eun'으로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사실 똑같은 기사는 작년 12월4일에 BBC 라디오에서 먼저 있었습니다. 같은 CHLOE HADJIMATHEOU 기자가 리포트를 했는데요. 인터뷰한 수면 클리닉의 홈페이지를 보니 BBC는 한국시간으로 12월2일에 취재를 해 갔다고 합니다. 결국 12월2일에 인터뷰한 걸 12월4일 라디오에서 보도한 뒤, 2월에 영어 교재로 만들고 4월에 온라인 기사로 다시 낸 겁니다.(제가 찾지 못한 또 다른 기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원소스 멀티 유스 (One source multi-use, OSMU)란 말이 있죠. 하나의 콘텐츠로 여러 매체에 활용하는 것인데요. 12월에 라디오에서 보도한 것을 4월에 온라인판에 올리는 건 원소스 멀티 유스가 흔해진 요즘 디지털 환경에서도 보기 어려운 일이죠. 특히 영어 교재로 활용한 내용을 NEWs처럼 내보낸 건 마치 교과서에 있는 얘기를 신문에 내는 것만큼 특이한 일이 아닐까 싶네요.한국 수면시간이 꼴찌?‥영국도 최하위권
수면시간은 측정하는 방법에 따라 편차가 심하지만 수면 부족 국가를 꼽을 때 한국과 일본이 빠지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BBC는 일본의 수면 부족 문제도 자주 다룹니다. 많은 경우 일본의 수면 시간이 한국보다 더 적게 나타나고 있지만 BBC 보도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한국이 최하위인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OECD 회원국 위주로 한 조사에서 한국은 남성이 하루 평균 461분으로 꼴찌이고 여성은 일본이 꼴찌입니다. 한국과 일본 바로 다음이 영국. 남녀 모두 최하위권입니다.
2020년 필립스의 '세계 수면 만족도 조사'를 보면 일본이 수면의 질 면에서도 최하위입니다. 한국과 영국도 하위권인데 두 나라의 차이는 그렇게 커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 수면제 중독 10만 명"X‥유럽 약물의 성지는 어디?
BBC는 "공식 통계는 없지만 한국의 수면제 중독자는 10만 명"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공식통계를 찾아 봤지만 수면제 중독만 따로 정리한 건 찾기 어려웠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를 보면 수면제뿐 아니라 해열제, 식욕억제제 등 한국의 모든 약물중독자는 연간 15,000명 정도입니다. 한국의 수면제 중독자가 10만 명이 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BBC에서 인용한 자료입니다. 유럽 약물 사망자 수(인구 백만 명당) 그래프를 보면 스코틀랜드와 영국이 유럽 내에서 압도적인 숫자를 보이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유럽의 약물 성지로 꼽히고 있는데 일부 화장실에 약물용 주사기를 버리는 별도의 쓰레기통이 설치돼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수면부족과 수면제 과다 복용‥영국에서 사회문제
2021년 2월 한국의 '머니투데이'는 "영국 국가대표 축구 선수가 수면제 중독이 심각하다"는 보도를 했습니다. 영국 매체 '더 선'을 인용한 것인데요, "이 선수가 암시장에서 구입한 수면제를 술과 함께 마시고 파티에 참석했는데 약물에 취해 테이블에서 춤까지 추었다"는 내용입니다.
BBC 홈페이지에 보면 약물과 수면에 관한 다양한 기사와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이 서구국가 중 가장 적은 수면 시간과 가장 심한 약물 중독 현상을 보이고 있으니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당연히 많은 보도를 해야 했을 테고 그것이 한국인의 수면시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공식통계는 없지만' 추정해 봅니다.
땡큐 BBC‥코로나 이후 폭증할 불면증 대비해야
잠이 부족한 것과 잠을 못 자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잠을 못 자는 건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죠. 국내 불면증 환자는 2015년 51만 3,748명에서 2020년 65만 6,391명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5년 만에 14만 명 이상 증가한 겁니다.(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
코로나19의 후유증 중 하나로 불면증이 제기되고 있습니다.2021년 이후 국내 코로나 환자가 급증한 만큼 불면증 환자가 대폭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이에 대한 사회적 대비를 세워야 합니다.
완전한 일상회복이 이뤄지면 미뤄졌던 회식이 속출하며 직장인의 수면을 방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회식도 일의 일부'라면 마땅히 근무시간에 하거나 점심 시간에 해야 합니다. 회사는 직원들의 수면권을 보호해야 하고, 그래야 업무능률도 오를 수 있습니다.
한국인 수면 시간에 대한 BBC의 집요한 보도는 우리에게 잠의 중요성을 일깨워 줬다는 점에서 매우 감사한 뉴스였습니다.
*BBC의 반론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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