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틀맨' 기시다 총리
지난해 10월 일본의 제 100대 총리에 취임한 기시다 후미오는 '젠틀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격도 부드럽고 다른 일본 정치인들과는 달리 과격한 발언도 잘 하지 않아 '적'이 없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춘풍접인春風接人을 좌우명으로 삼고 산다는데, 그 뜻이 '봄바람처럼 사람을 따뜻하게 대한다'라고 합니다.
일본 자민당 내에서도 '비둘기파'로 분류됩니다. 일본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강경파였던 아베 신조 전 총리나 아소 다로,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는 우리나라를 향해 막말도 많이 했는데, 기시다 총리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일관계 개선에 기대를 거는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윤석열 대통령의 적극적인 노력에 '춘풍접인春風接人'의 기시다 총리도 손을 맞잡아 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기시다 총리가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 기시다 총리 측근 "총리가 뚜껑이 열렸다"
지난 9월 15일, 우리나라 용산 국가안보실은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한일정상회담을 하기로 '흔쾌히' 합의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 언론들도 대서특필했지만, 일본 언론들도 깜짝 놀라 앞다퉈 뉴스를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그날 기시다 총리는 'キレた'고 합니다. 속어로 '감정이 격앙되어 이성을 잃어버렸다'는 뜻인데 우리말로는 '뚜껑이 열렸다' 정도에 해당됩니다.
화가 난 기시다 총리는 "결정되지도 않은 것을 마음대로 말해? 그렇다면 반대로 안 만나겠다" 고 했다고 합니다.
한일정상간 만남에 배석했던 기시다 총리의 측근은, 총리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윤 대통령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기시다 총리에게 처음엔 실망했습니다. 아니 뭐 저렇게까지 속좁게 굴 일인가? 자기가 정한 시간에 자기가 정한 장소로 윤 대통령이 찾아가기까지 했는데, '봄바람처럼 사람을 따뜻하게 대한다'는 기시다 총리가...
■ 지지율에 '죽고 사는' 일본 총리
과학적인 여론조사가 본격화된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선 내각 지지율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헌법에 5년의 임기가 보장된 우리나라 대통령과 달리, 일본의 총리는 지지율에 따라 재임기간이 달라집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5년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후쿠다 야스오 총리는 지지율이 30% 아래로 떨어지자 스스로 물러났고, '양치기 수상'이란 오명을 얻었던 아소 다로 총리는 지지율이 20% 이하로 떨어져 쫓겨나다시피 사임했습니다. 그 외 하토야마 유키오,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20% 언저리의 지지율을 보이자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지지율 관리에 실패한 탓에, 다들 임기 1년 내외의 단명 총리가 됐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선 내각 지지율 30%대를 '위험수역'으로, 20%대를 '퇴진수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취임 초 60%를 넘기던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습니다.
7월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내각 지지율이 불과 한두달 사이에 40%대로 폭락하더니
9월 16일 지지통신 조사에선 32.3%가 나왔습니다. 조사기간이 9월 9일부터 12일까지라고 하는데 왜 16일에 발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발표 전에 기시다 총리가 알고 있었을 겁니다.
지지율 하락 이유는 통일교 스캔들입니다. 자민당 자체 조사결과 전체 의원 381명 가운데 179명이 통일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어 왔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 국민들 피부에 와 닿게 설명하자면 이른바 '통일교 국정농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최○○ 국정농단 사태가 있었습니다.)
기시다 총리 입장에선 처음으로 30%대 지지율이 나왔으니, 총리 사임이 '우려' 수준을 넘어서 '현실'로 다가온 상황입니다. '플라잉 니킥'에 얻어맞은 상태였다고 비유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본인의 지지율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어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까지 신경을 쓰진 않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 '초조한' 총리와 '눈치없는' 대통령
하필이면 그때, 우리 용산 국가안보실에서 한일정상회담에 흔쾌히 합의했다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겁니다. 일본 정부와 상의도 없이.
양국 정상이 만나 과거는 잊고 서로 친하게 지내자고 하면, 우리나라는 진보성향 국민들이 불같이 일어나지만, 일본은 보수성향 국민들이 반발합니다.
우리 대통령이야 정상회담을 한다고 하면 지지층으로부터 호응을 받게 되지만, 기시다 총리는 그게 아닙니다.
32.3%의 위태로운 지지율 상황에서 '위안부 합의 파기' '강제지용 배상 판결' 등 현안이 해결되지 않은 채 기시다 총리가 한국 대통령을 만난다면, 일본 보수지지층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한일정상회담을 흔쾌히 합의했다는 뉴스만으로도 총리에게 등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의도는 없었겠지만, 우리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를 벼랑 끝으로 훅 밀어버린 모양새가 됐습니다.
■ 약식회담과 간담 : 한일정상촌극
이제 춘풍접인春風接人의 기시다 총리가 그토록 화를 낸 게 이해가 됩니다. 자신의 정치생명이 달린 상황이었습니다. 지지율 폭락으로 인한 '내각 총사퇴' 문제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위기 상황인데, 한국 정부가 눈치도 없이 한일정상회담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화가 났던 겁니다.
우리 정부의 정상회담 발표 4일 뒤인 9월 19일. 마이니치 신문 조사결과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이 29%로 추락했습니다. 지지율 30% 선마저 붕괴된 겁니다.(한일정상회담 발표가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는 보도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사히 신문 보도에 의하면, 일방적인 정상회담 발표 이후에도 우리 정부는 계속 일본 측에 한일정상회담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요청은 뉴욕에 도착해서도 계속됐다고 합니다.
기시다 총리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비유를 들자면, '플라잉 니킥'을 맞아 쓰러진 뒤 '암바'에 걸려있는데, 자꾸 누가 와서 '악수'를 하자며 한 손을 달라고 하는 상황입니다.
저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일본과 손을 맞잡았다는 것이고, 일본 정부는 손을 내민 게 아니라 '발목'을 잡혔을 뿐이라는 겁니다.
뉴스만 보면 기시다 총리가 너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절박한' 쪽은 기시다 총리였습니다. 절대로 '한일정상회담'을 하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약식회담'이라는 우리 나라 발표에 대해 일본이 굳이 '비공식 간담'이라고 고집한 이유였습니다.
■ 한일관계 덮친 '지지율의 저주'
미국의 물류회사 아마존과 우리나라 쿠팡을 보면, '실탄'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두 회사 모두 대규모 투자를 받아 영업 초반에 '밑지는 장사'를 하면서 시장점유율을 팽창시키고, 시장을 장악한 뒤 수익구조를 개선하는 전략입니다. '미래'의 번영을 위해서 '현재' 밑지는 장사를 하는 건 이제 시장 공략의 트렌드가 됐습니다.
아마존과 쿠팡에겐 '현금'이 실탄이지만, 한일 정상들에겐 '지지율'이 실탄입니다.
악화된 한일관계를 개선하려면 두 나라 정상들의 지지율이 높아야 합니다. 우리 대통령이든 일본 총리든 한일관계 개선은 당장은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밑지는 장사'입니다. 그러나 양국의 미래를 위해선 한일관계를 이대로 방치할 순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실탄'이 없는 정상들입니다. 지지율이 60%쯤 된다면 과감한 결단으로 국민을 설득해 양국 관계를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반대 여론으로 인해 지지율이 일시적으로 40%대까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국정 운영에 문제가 되는 수준은 아닙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현재 28%.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은 29%.
미래를 위해 지금 '밑지는 장사'를 하기엔 역부족인 지지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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