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당나귀 한 마리가 전부인 노총각, 4만원에 아내를 사오다
중국의 서북부 간쑤성 한 농촌 마을에 사는 가난한 총각인 유톄. 버려진 집에 살며 가진 것이라고는 당나귀 한 마리뿐입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여성 구이잉은 요로 질환으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출산도 불가능합니다. 오빠네 식구들과 함께 사는 구이잉은 새언니에 의해 유톄의 아내로 팔아 넘겨집니다. 누구도 구이잉의 의견을 묻진 않았습니다. 뿌리 깊은 남아선호 사상으로 여자가 귀한 중국에선 신부 지참금 '차이리(彩禮)'가 남아있습니다. 중국에서 유톄가 구이잉 가족들에게 준 '차이리'는 200위안, 우리 돈 4만원. 유톄는 아내 구이잉을 지극 정성으로 돌봅니다. 구이잉도 이런 유톄를 보며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됩니다.
가난해도 소박한 행복을 찾은 부부…하지만 찾아온 비극
세상은 이 둘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마을에선 재개발로 빈집이 철거되고, 빈집에 살던 이들의 터전도 사라집니다. 말 그대로 거리에 나앉게 된 그들은 진흙으로 직접 집을 짓습니다. 구이잉의 치료비 마련을 위해 닭도 키우고 돼지도 키웁니다. 비 내리던 어느 날 지붕 아래 누워 구이잉은 말합니다 "지금 내리는 빗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는 듣지 못했어" 하지만 소박한 기쁨도 잠시. 구이잉은 병이 악화돼 드러눕게 되고 결국 숨을 거둡니다. 농촌 일을 하러 잠시 집을 비웠던 우톄는 아내가 숨졌단 소식을 듣고 큰 상실감에 빠지게 됩니다.
중국 예술영화 인루천옌…중국 농촌의 적나라한 현실
이 이야기는 최근 중국에서 개봉한 <인루천옌(隱入塵煙, 먼지 속으로)>의 내용입니다. 가난한 농촌의 노총각, 장애가 있어 팔려가는 신부, 결혼 지참금 '차이리', 아파트와 흙집이 공존하는 배경까지 현재 중국 농촌 현실에서 벌어질 법한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에선 유톄보다 사정이 나은 형이 찾아와 정부가 재개발로 새로 지은 아파트를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에게 분양하기로 했는데 4천만 원짜리 집을 400만 원이면 살 수 있다며 유톄의 명의를 빌려 달라 말합니다. 당연히 유톄는 400만 원이 없습니다. 아파트를 찾아간 유톄는 언론에 제일 가난하지만 좋은 집에 당첨된 사람으로 '각색'됩니다. 결국 이득을 보는 건 명분을 챙긴 정부와 아파트를 갖게 된 유톄의 형이라는 사실이 중국 주택 제도의 허점을 보여줍니다. 영화 주인공처럼 간쑤성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감독 리뤼쥔은 지난 5일 인터넷 매체 졔몐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톄와 구이잉처럼 어디에나 쉽게 잊혀지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2022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분 후보에 오른 인루천옌 트레일러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2YyeQMBAOIc>
흥행 성공에 "중국 빈곤 퇴치 성과 깎아내려" 비판
이 영화는 지난 2월 72회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분 후보에 올랐습니다. 4억 원의 저예산 영화는 지난 7월 중국에서 개봉 이후 SNS를 통해 입소문을 타며 200억 원의 흥행 수입을 올렸습니다. 영화 예매 사이트 마오옌에서 평점 9.2를 기록했습니다. 예상 밖에 흥행을 한 겁니다. 하지만 중국의 농촌 현실을 지나치게 성실하게 반영했던 탓일까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3연임을 결정할 20차 당대회를 앞두고 중국의 빈곤 퇴치 성과를 나열해도 모자란 판국에 가난한 농촌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중국 매체 펑황왕에 오늘(27일) 올라온 기고문에는 "도덕적 전통이 있는 중국에선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며 "개별적인 현상이 있더라도 이것이 예술로 표현돼야 할 일이냐"는 비판이 실렸습니다. 영화 상영은 중단됐고, 스트리밍 플랫폼인 아이치이에서도 삭제됐습니다. 현재는 전체 영화가 아닌 일부 예고편, 리뷰만 볼 수 있습니다. 영화가 삭제됐다는 기사도 삭제됐습니다. 중국 장쑤성 쉬저우의 한 농촌 마을에서 쇠사슬에 목이 묶인 채 헛간에 갇힌 채 발견된 여성. 인신매매로 자녀 8명을 출산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출처 : 바이두)
'쇠사슬녀'의 미화버전? 결국 상영 중단
정말 인루천옌은 개별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일까요? 지난 1월, 장쑤성 쉬저우의 한 농촌 마을에서 인신매매로 자녀 8명을 낳은 '쇠사슬녀' 사연은 중국을 발칵 뒤집어 놨습니다. 94만원에 돈을 주고 아내를 산 남편(?)은 아내가 조현병에 걸려 사람들을 공격해 목에 쇠사슬을 걸고 헛간에 가뒀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여성은 미국 명문대에 합격해 베이징 겨울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구아이링과 비교되며 동시대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맞느냐며 중국인들의 공분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중국 농촌에선 인신매매가 이뤄집니다. 한 자녀 정책을 30년 넘게 이어온 중국은 뿌리 깊은 남아선호 사상으로 여자 아이를 임신하면 모두 낙태를 했기 때문에 남자의 성비가 월등히 높은 상황입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쇠사슬녀'가 미화된 버전일지도 모릅니다. 장애가 있는 아내를 돈으로 사온 유톄가 구이잉을 쇠사슬로 묶기 보단 온몸을 바쳐 돌보는 착한(?) 사내라는 점만 다릅니다. 이 습자지 같은 차이를 당국이 인식했던 탓인지 어쨌든 이 영화는 중국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중국어 제목에 맞춰 <리턴 투 더스트(Return to Dust, 먼지로 돌아가다)>입니다. 네티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화 제목 대로 정말 먼지로 돌아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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