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란드, K-9 자주포 '사재기'
어느덧 우크라이나 전쟁이 7개월을 넘겼습니다. 유럽에서 누구보다도 마음 졸이며 전황을 지켜보고 있는 곳은 바로 옆 나라, 폴란드입니다.
얼마 전 폴란드가 우리나라 K-2 탱크 1,000대와 K-9 자주포 670문을 약 10조 원어치나 구매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거의 '사재기' 수준입니다. (우리 육군에 가야 할 물량까지 폴란드로 팔리게 돼 안보공백 논란까지 생겼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의외의 전투 양상 때문입니다. 첨단 무기로 승패가 갈릴 줄 알았는데 뜻밖에 재래식 무기가 결정적입니다. 점령지를 뺏고 다시 탈환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재래식 무기'가 맹활약하는 상황입니다. 마치 6.25 전쟁 당시 고지탈환 전투처럼.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면서 적국의 침공을 막기 위해선 재래식 무기가 절실하다는 걸 깨닫게 된 겁니다. ('포방부'라고 놀림받을 정도로 재래식 무기 개발에 힘써 온 우리나라 국방부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재래식 무기만 따지면 세계 6위로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보다 앞섭니다.)■ 러시아, 포탄 다 퍼부었나
지난달 6일, 뉴욕타임스에 눈길 끄는 뉴스가 떴습니다. 러시아가 수백만 발의 '북한'제 재래식 포탄과 로켓을 구입한다는 겁니다. 미국 정보당국은 서방의 경제제재가 러시아의 군수물자 생산에 타격을 입힌 증거라고 설명했습니다.
북한의 포탄과 로켓은 옛 소련제를 모방한 것이라, 러시아 군의 무기 체계에 안성맞춤입니다. 자연스럽게 '호환'이 됩니다. 다만 북한제 포탄을 갖다 써야 할 만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있는 폭탄 없는 폭탄'을 다 퍼부었다는 생각에 이르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비슷한 시기 월스트리트저널엔 미국의 155mm 포탄이 바닥났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사실상 우크라이나에서 대리 전쟁을 하고 있는 미국은 그동안 106억 달러, 약 14조 원의 무기를 지원해 왔습니다. 미국 역시 '있는 폭탄 없는 폭탄'을 우크라이나로 실어 날랐고, 이 때문에 "현재 미국의 155mm 포탄 재고는 (만약 미국에서 전쟁이 난다면) 전투 수행이 어려운 수준"이 된 겁니다.
한 미군 관계자는 새로 155mm 포탄을 발주해서 생산해 납품받는데까지 13개월에서 18개월이 걸린다고 밝혔습니다. 그건 러시아도 비슷할 겁니다. 1년 반 뒤엔 전쟁이 끝날 수도 있으니, 새로 만들기 보다는 북한에서 가져오는 편이 낫습니다.
첨단 기술이 넘치는 21세기 전쟁에서, 재래식 무기가 이렇게 중요하다니 예상 밖의 전개입니다.■ 다급히 이어진 북-러 철길
러시아가 북한의 재래식 무기를 수입한다는 뉴욕타임스 보도에 북한이 이례적으로 반박에 나섰습니다. 북한 국방성은 "우리는 지난 시기 러시아에 무기나 탄약을 수출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러시아 정부 역시 "가짜 뉴스"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러자 미국 국무부는 "러시아-북한간 무기 밀매는 사실이며, '우리 정보 커뮤니티'의 주요 활동에 근거한 정보”라고 재반박에 나섰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국의 정보 커뮤니티에는 NATO나 한국은 물론 일본도 포함됩니다.
"Well, we believe that it is true, and this is rooted in the important work being done by our intelligence community." - 베던트 파텔 미 국무부 부대변인 (9/7) -
그런데 하필이면 다음날인 9월 8일, 근 3년 동안 끊겼던 북-러 철도 운행이 재개됐습니다.
코로나-19로 북한은 혈맹국인 중국, 러시아와도 국경을 폐쇄했습니다. 철도도 물론입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북러간 무기 매매 뉴스 직후, 북한 신홍철 대사와 러시아 올레그 연해주지사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에서 철도 재개에 전격 합의했다는 겁니다.
북한이 무엇을 싣든 간에, 두만강의 러시아 요충지 '핫산'에서 바퀴(차륜)를 바꾼 북한 열차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따라 광활한 유라시아를 일주일 정도 지나면 우크라이나까지 갈 수 있습니다.(북한과 러시아의 열차 궤도는 폭이 다릅니다. 그래서 북한 열차가 무기를 싣고 가더라도, 핫산에서 열차를 들어 올려 궤도에 맞게 대차교환 작업을 해야 합니다.)
■ '일본 간첩 잡혔다'‥블라디보스토크 발칵
지난 월요일,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일본인 모토키 다츠노리를 간첩 혐의로 체포했습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영사였습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이 배포한 동영상이 있는데, 모토키 영사가 식당에서 한 여성으로부터 서류를 넘겨받는 장면이 담겼습니다. (해당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은 모자이크 처리를 해 놔서 러시아인인지 동양인인지 구별이 어렵습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은 이들이 러시아와 '아시아-태평양 국가'간 기밀 협력 정보를 '거래'했다고 밝혔습니다. 첩보 수집에 '금품'이 오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아시아-태평양 국가'가 어느 나라인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일본 정부는 모토키 영사의 간첩 행위에 대해 사실 무근이고 증거가 없다며 강력히 반발했지만‥모토키 영사는 결국 추방됐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북한전문매체 NK뉴스는 일본 영사가 챙긴 게 북한-러시아 간 기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습니다.
① 러시아와 북한의 무기 매매 의혹
② 러시아가 병합한 동부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북한 노동자를 투입하는 방안
이 두 가지 '비밀'이 서방에 알려진 시점에서, 일본 영사 간첩 사건이 터졌다는 걸 근거로 보고 있습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이 '간첩 동영상'까지 촬영해 공개한 건 좀 이례적이긴 합니다.■ 실력있는 일본 정보기관 '공안조사청'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계획을 가장 먼저 알아낸 곳은 CIA나 MI-6, 모사드 같은 서양 정보기관이 아닌 일본의 공안조사청이었습니다. 1983년엔 소련 전투기가 우리나라 대한항공 여객기를 격추한 참극이 있었는데, 이때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연루설을 극구 부인했습니다. 그러다 일본 공안조사청이 소련 전투기 조종사의 교신 내용을 감청해둔 걸 밝히면서 소련 정부가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안조사청은 내각정보조사실과 함께 일본의 양대 정보기관으로 꼽힙니다.
내각정보조사실이 각 기관의 정보를 수집해 가공하는데 주력한다면, 공안조사청은 직접 상대국에 협력자를 포섭해 첩보를 입수하는 현장 업무에 특화돼 있습니다.
만약 러시아 연방보안국의 발표대로 '금품'거래를 수반한 첩보활동이었다면, 돈 잘 쓰기로 소문난 공안조사청의 공작방식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리고 이번 북-러 무기 매매 첩보도 공안조사청이 입수한 게 맞다면, 러시아 입장에선 아프간 침공과 전투기 교신에 이어 벌써 3번째 공안조사청에 '당한' 겁니다.
올해 5월 일본이 내각정보조사실과 공안조사청 등을 통합해 J-CIA를 설립한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일본 정부가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주변국 위협에 대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동방의 진주, 블라디보스토크
서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국적기로 1시간 40분 거리입니다.(우리나라 항공기는 북한 영공을 통과할 수 없어 좀 더 걸립니다.)
코로나 이전, '가장 가까운 유럽' 블라디보스토크는 NO-Japan 운동으로 일본 여행을 기피한 한국 젊은 여성들이 즐겨 찾던 관광지였습니다. 일본, 중국, 북한과 지리적으로 더 가깝지만, 한국을 좋아하는 러시아 정부는 오로지 한국에만 90일 무비자 관광을 허용했습니다. (북한 관리들이 "로씨아가 왜 북조선은 괄시하고 남조선만 무비자를 내주는 지 모르갔다"며 불만을 표할 정도입니다. 세계 어딜 가나 넘치는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선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스탈린은, 벨라루스의 슬라브족 수십만 명을 끌고 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시켰습니다. 모스크바 등 '서'러시아의 슬라브족이 유럽인과 섞이면서, 지금은 오히려 극동에 고립됐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슬라브족 혈통이 더 잘 보존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워낙 날씨가 춥다 보니, 블라디보스토크 사람들은 추운 날씨에도 고장이 잘 나지 않는 일본 중고차를 선호합니다. 거리엔 온통 토요타와 혼다 자동차 뿐입니다. 거기에 북한 노동자들이 많이 와 있습니다. 한 한국 교민은 하수 배관이 고장 나 수리를 맡겼더니 북한 사람들이 와서 고치고 갔다고 합니다. 최근 건축한 빌딩들 중엔 북한 노동자들이 지은 게 많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사흘 걸릴 일을 그냥 밤새서 하루 만에 끝내버린다고 합니다. (북한 노동자들은 비자 기간이 정해져 있어 한정된 시간에 돈을 더 많이 벌려면 잠을 안 자야 한다고 합니다.)
고풍스러운 유럽 건물, 슬라브족 주민들, 한국인 관광객, 일본 자동차, 북한 노동자까지.
블라디는 묘한 '국제도시'입니다. ■ 스파이들의 각축장, 블라디.
그러나 이 아름다운 블라디보스토크는 사실 각국 '스파이'들의 각축장입니다.
한국.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우선 북한 영사관이 있습니다. 북한은 고려항공이 취항한 도시를 공작 거점으로 씁니다. 고려항공은 현재 베이징, 선양, 블라디보스토크 세 도시에만 취항해 있습니다. 중국 공안들이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베이징과 선양은 북한으로선 조심스러운 곳입니다. 그러나 수도 모스크바와 9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극동 블라디보스토크는 상대적으로 활동이 쉬운 편입니다. (지난 2020년 대북 경제 제재 하에서 북한이 김정은 위원장을 위한 '메르세데스 마이바흐' 2대를 몰래 밀수해 들여갔는데, 바로 블라디보스토크가 공작 거점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영사관이 있습니다. 간혹 우리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 직원들이 러시아의 도감청을 피하기 위해 유선전화나 휴대전화 대신 '보이스톡'을 이용한다는 걸 보면, 영사업무만 하는 건 아닌 듯 합니다. 곳곳의 북한 고려식당에서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람을 만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파이'들이 몰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러시아 입장에선 혈맹인 북한도, 또 북한의 뒤를 캐는 한국이나 일본의 첩보 활동도 굳이 엄격히 막을 필요가 없었습니다.(호텔이나 쇼핑몰에서 러시아 극동함대 기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을 만큼 보안이 허술합니다) 오히려 여러 국가의 '스파이'들이 부대끼면서 서로 정보를 뺏고 빼앗기다 보면 러시아도 양질의 정보를 챙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러시아가 북한보다 '스파이'에 예민한 처지가 됐습니다. NK뉴스의 분석대로 러시아와 북한의 은밀한 거래가 일본 영사에게, 일본의 정보기관에게 노출됐던 거라면, 러시아는 더 이상 블라디보스토크의 '스파이'들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흘러나간 첩보가 10,000km 떨어진 우크라이나의 전세를 흔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의 간첩 동영상은 이제 블라디보스토크에 '스파이를 잡는 스파이'까지 가세했다는 신호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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