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서 온 빨갱이 돼지새끼, 구제역 걸리기 전에 꺼져라"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던 정순신 변호사는 아들의 고등학교 시절 학교폭력 가해 사실이 드러나면서 임기 시작을 하루 앞두고 낙마했습니다. 아들 정 씨가 지난 2017년 강원도 횡성의 유명 사립고등학교인 민족사관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1학년 1학기부터 동급생인 피해 학생에게 언어폭력을 가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겁니다.
정 씨가 피해 학생을 부르는 단어는 "돼지 새끼"였습니다. 피해 학생의 아버지가 제주도 출신이라는 점을 두고 "빨갱이"라고 비하하며, "제주도에서 온 새끼는 빨갱이 새끼"라고 말했습니다. 식사 시간에 정 씨가 있는 테이블에 피해 학생이 앉으려 하면, "돼지 새끼, 넌 사료나 처먹어야 한다, 구제역 걸리기 전에 꺼지라"고 말하며 쫓아냈습니다. 정 씨와 피해 학생의 모습을 지켜봤던 주변 학생들은 정 씨가 이런 말을 "횟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자주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친구들과 후배들 앞에서, 기숙사와 교실에서, 상황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계속된 언어폭력에 피해자는 학교생활 제대로 할 수도 없었습니다. 1학년 1학기, 민족사관고등학교 학생들 가운데 상위 30%였던 성적은 학사경고를 받을 정도로 뚝 떨어졌고, 정 씨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온몸을 떨며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2학년 1학기가 시작된 2018년 3월에는 자살 시도를 할 만큼 상황이 심각해졌습니다.
강원도학교폭력대책지역위원회는 정 씨에게 학교폭력에 대한 최고 수준의 징계 중 하나인 '전학 처분'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정 씨는 1년이 더 지난 2019년 2월, 3학년이 되기 직전에서야 실제로 전학을 갔습니다. 전학 처분에 불복해 재심을 청구하고, 행정 소송까지 내며 시간을 끌었기 때문입니다.'학폭위 처분 억울하다'… 1년 넘게 걸려 76% '기각'
정 씨처럼 학교폭력 징계를 취소해달라고 낸 행정소송은 얼마나 될까요? 누가 소송을 냈고, 얼마나 받아들여졌는지도 궁금했습니다. 특히 소송이 학폭위 처분을 무력화하는 '시간 끌기'에 악용되는지도 검증해봐야 할 문제였습니다. MBC는 최근 1년 동안 선고된 1심 판결 128건을 전수조사했습니다. 법원 판결문 열람시스템에서 지난해 2월부터 1년 치, '학교폭력'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행정소송 판결문을 모두 검색한 뒤, 학교폭력 당사자들이 학폭위의 결정을 취소해달라고 낸 판결문 128개를 추렸습니다.
128건 가운데 108건은 가해 학생이 "징계가 너무 무겁다" 혹은 "학교 폭력이 아니"라며 낸 소송이었고, 나머지 20건은 반대로 피해자가 "징계가 가볍다"며 냈습니다. 가해 학생이 낸 소송 가운데 약 76퍼센트에 해당하는 82개의 사건에서 법원은 학폭위의 기존 징계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절차적 문제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징계를 그대로 유지했지만, 그 사이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첫 징계 처분에서 1심 판결까지 걸린 시간은 평균 12.3개월로 1년이 넘었습니다. 1심 선고까지 가장 오래 걸린 시간은 36개월, 꼬박 3년이었습니다. 35건의 판결은 이미 가해 학생이 학교를 졸업한 뒤 내려졌습니다. 소송의 목적이 정말 학폭위 처분을 되돌리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시간 끌기가 목표였다면 성공했던 겁니다. 1심 선고까지도 이런데, 2심과 3심까지 끌고 가면 시간을 더 끌 수도 있습니다. 정 씨의 소송이 1심 판결 뒤 2심을 거쳐 최종 대법원에서 확정될 때까지 7개월이 더 걸렸습니다.
정 씨 학폭은 어느 정도? "자살 시도하게 한 유례없는 언어폭력"
정 씨와 피해 학생을 지도한 고등학교 선생님은 "언어폭력으로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극심한 피해가 발생한 건은 거의 유례가 없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정 씨는 신체적 폭력이나 성범죄 등 다른 유형 없이 언어폭력만 가했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무거운 처분인 전학이 합당할 정도로 중하다는 맥락이었습니다. 128건의 판결문 분석 결과도 정 씨의 폭언이 다른 일반적인 언어폭력보다 더 잔혹한 폭력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했습니다.
128건의 판결 중 정 씨처럼 가장 무거운 처분인 '전학'이나 '퇴학' 처분을 받은 학생은 모두 29명이었습니다. 대부분 성폭력과 불법 촬영, 신체적 폭행 등이 수반된 학교폭력이었습니다. 정 씨의 경우처럼 언어폭력만으로 전학이 결정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판결문 분석을 통해 정 씨의 언어폭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새삼 확인된 셈입니다.
"맞기 싫으면 참새 머리를 깨물어라"… 더 가혹해진 학교폭력
그렇다면 전학·퇴학이 결정될 정도의 학교폭력은 어땠을까? 언어폭력과 물리적인 폭력, 성범죄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학교폭력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그 강도는 엽기적이고 가학성도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자신보다 3살 어린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을 목발로 폭행하거나, 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주차장에 눕힌 뒤 이불과 자전거를 쌓아 올리며 괴롭힌 초등생도 있었습니다. "맞기 싫으면 참새 머리를 깨물라"며 협박해, 실제로 참새 머리를 절단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물리적 폭력과 성추행, 협박까지 다양한 학교폭력의 양상이 함께 나타난 겁니다. 128건 가운데 58건은 여러 유형의 폭력이 복합적으로 발생했습니다.
가짜 SNS로 계정으로 피해 학생을 협박해 옷을 벗고 춤추는 동영상을 전송받고 돈을 빼앗은 뒤, 학교에서는 성추행을 일삼은 한 중학생, 전학 처분을 받았습니다. 빨래와 화장실 청소, 안마 등 심부름을 시키고 라이터와 스프레이로 피해 학생에게 여러 차례 화염을 쏜 고등학생도 전학 처분을 받았습니다. 판결문에는 커터칼로 위협하거나 기숙사에서 술을 먹게 강요하고, 고환을 때리거나 피해 학생의 입에 방울토마토를 욱여넣은 뒤 이를 촬영까지 한 잔혹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이 밖에도, 이른바 '햄버거 놀이'와 '기절 놀이'를 빙자해 피해 학생이 기절할 정도로 폭행한 뒤 이런 장면을 SNS에 올리거나, 심각한 수준의 성폭력을 저지른 학생들이 전학 및 퇴학 처분을 받았습니다.
언어폭력과 성범죄 등 학교폭력에 이제 SNS는 흔한 도구였습니다. 친구에게 피해 학생을 소개해 준 뒤 두 사람의 성관계 장면을 촬영해 유포한 고등학생은 퇴학을 당했습니다. 학교폭력 열 건 중 세 건에는 강간과 성희롱, 불법 촬영 등 성범죄가 등장했고, 판결문 6건 가운데 1건에 명시적으로 SNS가 쓰였다고 적혀 있었습니다."부모도 함께 특별교육"… 정순신, 부모 특별교육도 상위권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은 학창 시절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자주 했습니다. 정 씨의 친구들은 정 씨가 평상시에도 "아빠 아는 사람이…"라며 아버지 자랑을 자주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면서 "정 씨가 '검사라는 직업은 다 뇌물을 받고 하는 직업이다, 아빠는 아는 사람이 많은데 아는 사람 많으면 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 판사랑 친하면 재판에서 무조건 승소한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정순신 변호사는 아들이 징계를 받은 뒤 진술서 작성 등 이후 절차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학교 선생님도 이런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당시 교사는 "사실 전혀 반성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고 부모님이 책임 인정하는 걸 되게 두려워하신다. 1차로 진술서를 썼는데 바로 부모 피드백 받아서 그렇게 쓰면 안 된다고 해 다시 교정받아오는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학교폭력을 저지른 학생에게 내리는 징계 중에는, 학생의 부모도 함께 교육을 받게 하는 처분이 있습니다. 제일 가벼운 처분인 '서면사과'나, 가장 무거운 처분인 '퇴학' 등을 제외하고 보복 금지, 봉사, 전학 등의 징계를 받으면 학생은 별도로 특별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데, 이때 보호자도 심의위원회가 정한 만큼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정 씨와 정 씨의 보호자에게는 특별교육 10시간의 징계도 함께 내려졌습니다. 판결문 분석 결과, 전체 4건 중 3건에 해당하는 93건의 가해자들이 부모도 특별교육을 함께 이수해야 한다는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가운데 정 씨의 부모보다 더 긴 '특별교육'을 받아야 했던 보호자는 10퍼센트가 채 안 됐습니다.
사회
정상빈
[서초동M본부] 법정 찾은 또 다른 정순신들‥판결문 128건을 보다
[서초동M본부] 법정 찾은 또 다른 정순신들‥판결문 128건을 보다
입력 2023-03-04 08:00 |
수정 2023-03-0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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