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 법원(대전지법 서산지원)이 '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한 50대 남성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습니다. MBC가 작년 12월 처음 보도했던 故 최수롱 씨 친족 성폭력 사건입니다.
▶[단독] '친족 성폭력'에 숨진 21살‥"얼마나 더 고통받아야"
▶[단독] 피해자 떠난 뒤에야 구속‥친모까지 압박한 가해자
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desk/article/6439653_35744.html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지 16개월 만에야 내려진 1심 판결. 하지만 수롱 씨는 판결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지리한 법정 공방 속에서 심신이 지친 수롱 씨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판결은 수롱 씨가 눈을 감은 뒤 6개월 만에 나왔습니다.
지난번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재판부에 "징역 10년을 선고해 달라" 했는데, 딱 그 절반으로 형량이 결정됐습니다. 재판부는 어떤 근거로 이런 결정을 했을까요.
경찰 공무원을 꿈꾸며 서울의 한 전문학교에 입학했던 21살 수롱 씨는 작년 1월 1일 저녁, 어머니와의 이혼 뒤 10년 이상 보지 않았던 친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폭행과 감금,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아버지가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했으며, 사건 당시 녹취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면서 "1천만 원에 합의하자"는 의사를 전해왔습니다.
재판은 아버지의 건강 상태 등을 이유로 번번이 지연됐습니다. 대학 신입생,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야 할 수롱 씨에겐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겁니다. 수롱 씨가 남긴 메모에는 "열 달이 지나도록 사건의 진전이 없다. 언론에 뜨지 않는 사건이라고 사법부는 눈길조차도 안 주는 걸까"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작년 11월, 수롱 씨는 학교 기숙시설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수롱 씨의 죽음 뒤 열린 첫 재판에서야, 법원은 "증거 인멸과 도주 우려가 있다"며 아버지를 직권으로 구속했습니다.
법원은 왜? 판결문 읽어보니‥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5조(친족관계에 의한 강간 등) ② 친족관계인 사람이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제추행한 경우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친족 강제추행죄의 법정형은 '징역 5년 이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범행의 심각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이 사건 범행은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및 범행의 반인륜적 성격에 비춰볼 때 그 죄질이 불량하고 비난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피해자의 정신적 충격도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는 이 사건 이후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피해자 모친의 정신적 충격도 대단히 큰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은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했다. 피해자와 피해자의 모친은 피고인에 대한 엄벌을 탄원했다", "피고인은 과거 다수의 폭행 범죄 전력이 있음에도 이 사건 강제추행 범행 과정에서 또다시 피해자를 폭행하였다…"
모두 피고인에게 법정형보다 더 무거운 형을 내릴 수 있는 정황들입니다.
재판 당시 피고인 측의 태도는 반성 없는 '적반하장'에 가까웠습니다.
피고인인 아버지와 변호사는 "당시 딸을 폭행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강제추행한 사실은 없다", "처음엔 피해자가 (술에 취해) 딸인지 모르고 폭행했다가 그 후 사과하면서 화해하기 위해 포옹과 뽀뽀를 시도한 것이다", "딸이 경찰 공무원 준비하는 걸 반대했고, 2017년부터는 경제적으로 지원도 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딸이 아버지에게 강한 반감을 갖고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피해자인 딸은 일관되게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내용의 진술을 하였고, 이 진술 내용이 비합리적이거나 모순된다고 보이는 부분을 찾기 어렵다",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한 뒤 출동한 경찰관을 만나게 된 것으로 신고 경위가 자연스럽다", "피해자의 진술은 이 사건 녹음파일, 사진 등 객관적 증거에도 부합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피고인 측 주장을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 판단은 법정형 하한선, '징역 5년'에 그쳤습니다.
왜일까요.
"피고인에게 성범죄 전과가 없고,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측면이 있다"는 게 최종 형량에 대한 재판부의 설명이었습니다.
<전에는 성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범행 당시 술에 취해 있었다.>
피고인이 전혀 반성하지 않고 피해자 측이 엄벌을 호소했지만, 재판부는 위와 같은 사정을 고려해 피고인의 형량을 가볍게 했다는 겁니다.
"내가 왜 유죄야!!" 소리친 피고인
피고인인 아버지는 이날 판결 선고 뒤 법정을 나가면서 "내가 왜 유죄냐?"고 소리를 질렀고, 재판을 지켜본 수롱 씨의 어머니는 한참을 흐느껴 울었습니다. 함께 재판을 방청했던 여성단체들은 "크게 낮은 형량"이라고 반발했습니다. 충남 지역 여성단체와 피해자보호단체들의 연합인 '충남여성복지시설협의회'는 이번 사건에 대한 입장문을 냈습니다.
■ 충남여성복지시설협의회 입장문(5월 26일) ■
가해자가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범행을 했다는 이유는 부당합니다.
재판부는 가해자에게 이전에 다수의 폭행 범죄전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수차례의 폭행 범죄전력이 있는 가해자가 그날 저지른 폭력과 성폭력이 과연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저지른 행동일까요? 앞으로 더 이상은 이 사회에서 '술을 마셨다'는 것이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해자에게 성범죄 전력이 없는 것이 딸에 대한 성폭력범죄 처벌에 대한 유리한 사유가 될 수 없습니다.
가해자는 21살 딸에게 폭력을 하면서 성폭력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딸이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해 딸은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러한 범죄에 대해 성범죄 전력이 없음을 유리한 사유로 본다면 앞으로도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은 사법기관에 처벌을 요청하기 힘들어질 것입니다.
어린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이 기나긴 사법절차를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신고 후 가해자 처벌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기간이 너무 깁니다. 어린 피해자들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오래 걸리는 사법절차의 기간에 대한 재고를 요청합니다. 이 사회가 피해자들을 지켜내기 위한 제도적 개선이 필요합니다.
친족 성폭력, 10년 이상 걸려서 고백‥구속은 "6명 중 1명"
오늘같은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매.마.토')마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 단체가 광화문에 모여서 피켓을 듭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통계에 따르면 친족 성폭력 피해를 당한 후 처음으로 상담을 받기까지, 즉 외부에 알리기까지 '10년 이상 걸렸다'고 얘기하는 피해자가 전체의 55%에 달합니다. 한 집에 살고 있고, 누구보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인 가족을 등져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일 겁니다. 친족 성폭력의 특성상 초범이냐 재범이냐를 따지는 게 큰 의미가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경찰이 꿈이던 수롱 씨는 성폭력 피해를 당한 뒤 현장에서 곧바로 신고했지만 여러 번 좌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성폭행을 시도했다"고 진술하고 녹취도 제출했지만 인정된 혐의는 '성폭행 미수'가 아닌 '강제추행' 뿐이었습니다. 재판부에 "혐의가 잘못됐다"며 엄벌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재판은 사건 발생 후 반 년 넘게 열리지도 않았습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친족 성폭력 사건은 한 해 평균 3백건 이상이지만 구속률은 17%, 6명 중 1명 꼴에 그칩니다. 수롱 씨 사건 역시 가해자인 아버지에게 폭력 전과가 있었음에도 구속영장은 신청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해자인 수롱 씨와 어머니가 스마트워치를 받고, 쉼터를 전전해야 했습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개인 정보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징역 5년. 피고인은 "형이 무겁다"며 항소했습니다. 검찰도 "형이 가볍다"며 항소를 했습니다. 가해자가 "술을 마셨다", "우발적이었다", "성범죄 전과가 없다"는 정황이 과연 항소심에서는 어떻게 작용하게 될까요.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1388', '다 들어줄 개' 채널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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