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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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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M본부] "18살 최말자는 무죄다"‥법원을 향해 '법'과 '양심'을 묻다

[서초동M본부] "18살 최말자는 무죄다"‥법원을 향해 '법'과 '양심'을 묻다
입력 2023-06-03 09:00 | 수정 2023-06-03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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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초동M본부] "18살 최말자는 무죄다"‥법원을 향해 '법'과 '양심'을 묻다
    "나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다."

    지난달 31일, 뙤약볕이 내리쬐는 대법원 정문 앞. 머리가 하얗게 센 여성이 홀로 서 있습니다. 노년의 여성이 1인 시위를 벌이는 중입니다. 여성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나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올해로 77살인 최말자씨입니다.

    최 씨는 지난 1964년 5월, 자신을 강제로 키스한 남성의 혀를 깨물어 잘라냈다는 이유로 법원으로부터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최 씨는 이 사건을 다시 재판해 달라며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습니다. 최 씨는 말합니다. "59년 전 재판 결과는 잘못됐다"고, "18살의 자신은 무죄"라고…

    <생면부지 남성의 '강제키스'‥혀 깨물었더니 '구속 기소'>

    지난 1964년 5월 6일, 경남 김해의 한 농촌. 일면식 없는 남성이 최 씨의 친구들을 뒤따라 최 씨의 집까지 찾아왔습니다. 최 씨는 무서워하는 친구들을 위해 남성을 다른 길로 유인했습니다. 그러자 남성은 갑자기 발을 걸어 최 씨를 넘어뜨렸습니다. 그러곤 배 위에 올라타 키스를 시도했습니다. 최 씨의 코를 막아 입을 벌리게 한 겁니다. 최 씨는 남성의 혀를 깨물여 혀 1.5cm를 잘라냈습니다.

    60년 가까이 지났는데 최 씨는 당시 상황을 뚜렷하게 기억했습니다. "배 위에 올라타고 양손을, 내 양손을 잡는 거예요. 잡으니까 꼼짝도 못하죠."

    당시 지역 언론사들은 이 사건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최 씨의 성폭력 피해보다는 가해 남성이 혀가 잘린 사실에 더 집중했습니다. 남성을 동정하는 식의 기사가 쏟아진 겁니다.
    [서초동M본부] "18살 최말자는 무죄다"‥법원을 향해 '법'과 '양심'을 묻다
    "처녀에게 키스 한 번 하려다가 혀를 깨물려 벙어리가 되었다." - 1964.5.13 <부산일보>
    "노총각은 병신 된 데다 오히려 벌을 받아야 할 처지다...과연 처녀의 입술이 총각 혀를 두 동강이 낼 만큼 값진 것인지." - 1964.5.14 <국제신문>


    이 사건을 처음 수사한 경남 김해경찰서는 남성을 강간미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최 씨의 행위는 정당방위로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에서 모든 게 뒤바뀌었습니다. 사건 발생 네 달 만에 검찰은 최 씨를 중상해 혐의로 구속하고 재판에 넘겼습니다. 가해 남성의 강간 미수 혐의는 기소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남성이 사건 이후 흉기를 들고 최 씨 집을 찾아가 난동을 부린 혐의만 적용한 채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강제키스' 재연에 '순결성' 검사까지‥구경거리가 된 재판>

    사건 발생 다섯 달 만에 열린 재판. 성폭력 피해자였던 최 씨는 수의 차림으로 법정에 섰습니다. 성폭력 가해남성은 평상복 차림이었습니다.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란히 피고인석에 선 상황. 피해자 분리 같은 건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네 달간 이어진 재판 과정은 더욱 더 무자비했습니다. 재판부는 최 씨의 '순결성'을 감정하는가 하면, 최 씨의 심리를 파악하겠다며 정신감정까지 맡겼습니다.
    [서초동M본부] "18살 최말자는 무죄다"‥법원을 향해 '법'과 '양심'을 묻다
    심지어 최 씨에게 강제로 키스당하던 상황을 재연시켰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에 최 씨와 가해 남성을 데려와 현장을 검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성폭력 재현은 동네 구경거리가 됐습니다. 주민 수백 명이 몰려왔습니다. 현장에는 "너놈이 내 자식 신세 망쳤다"는 최 씨 어머니의 통곡 소리와 "총각이 처녀와 키스하는 게 뭐 대단한 일이냐. 너의 입술은 금덩어리냐"는 총각들의 외침이 뒤섞였습니다.

    재판부는 최 씨에게 "가해 남성과 결혼할 생각이 있냐"고까지 물었습니다. 장애를 갖게 된 남성과 결혼해 책임을 지고, 합의하라고 제안한 것입니다. 최 씨는 "차라리 벌을 받겠다, 죽어도 저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지난했던 재판 끝에 법원은 최 씨에게 징역 10개월, 남성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형 집행이 2년 미뤄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최 씨가 더 센 처벌을 받은 것입니다.

    정당방위였다는 최 씨 주장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사춘기 소녀인 최 씨가 호기심을 갖고 남성을 따라가, 키스 충동을 일으킨 책임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면서 혀를 끊는 것은 정당방위를 넘어서는 수준의 지나친 행위라고 판단했습니다.

    "최 씨가 범행장소까지 간 것은 사춘기 소녀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의 소치..남성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키스하려는 충동을 일으키는 데 보탬이 됐을 것이라는 도의적 책임이 있다".
    "남성이 혀를 넣었다는 것 뿐이지, 강제 키스로 하여금 반항을 못하도록 꼼짝 못하게 한 것이 아니므로 혀를 끊어버려 일생 말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방위 행위는 법이 허용한 상당한 방위의 정도를 지나친 것" - 1965.1.12 부산지방법원 판결문


    <형법학 교과서의 '정당방위' 대표사례‥ 50년 넘게 달라진 건 없었다 >

    이 사건은 형법학 교과서의 정당방위를 설명하는 대표 사례로 실리면서 유명해졌습니다. 1995년 법원행정처가 발간한 법원 100년사에도 소개됐습니다.

    하지만 정작 사건의 주인공인 최말자 씨는 50년 넘게 이 사건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최 씨가 구치소에서 132일을 보낸 사이, 최 씨 아버지는 최 씨의 언니가 비슷한 일을 당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결혼 시켰습니다. 최 씨는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풀려난 뒤에도 주위 사람이 저 가시나 교도소 갔다, 감방 살았다고 손가락질했다. 그 수모는 어떻게 말을 다 하겠냐"며 하소연했습니다.

    지난 2018년, 72살의 최말자씨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통해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미투(ME TOO)' 운동이 크게 대두되던 상황이었습니다. 최 씨는 <성, 사랑, 사회> 라는 강의를 듣다가, 54년 전 자신이 겪은 일이 성폭력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함께 수업을 듣던 지인의 도움을 받아 <한국 여성의 전화>를 찾아갔습니다. 2년의 준비 끝에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습니다.

    형사소송법 제420조는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원래 판결보다 가벼운 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되거나, 재판에 참여한 판사나 검사 등이 직무에 관한 죄를 지은 것이 증명됐을 때입니다.

    당시 최 씨는 크게 네 가지 사유로 재심을 신청했습니다.

    1. "일생 말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됐다"던 남성이 병역 심사에서 버젓이 1등급 판정을 받은 것을 미뤄보아, 중상해가 아니라는 것.
    2. 당시 수사 과정에서 검찰이 최 씨를 불법 구금을 하고 자백을 강요했다는 것.
    3. 당시 재판부가 정당방위 규정에 대한 해석을 잘못했다는 것.
    4. 재판 과정에서 판사가 '순결성 검사'를 하거나, 가해자와의 혼인을 강요하는 등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를 했다는 것.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당시 사건 뒤집을 수 없다">

    하지만 1심과 2심 재판부는 최 씨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각 사유에 대한 기각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가해 남성이 혀가 잘려 발음이 어눌해진 것 역시 중상해로 볼 수 있다
    2. 불법 구금과 자백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
    3. 정당방위 규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의 문제는 재심 청구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점
    4. 성차별적 인식과 가치관이 뿌리 깊게 존재한 당시 사회에서 각자 주장을 판단하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 볼 수 있다는 이유.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여, 사회문화적 환경이 달라졌다고 하여 당시의 사건을 뒤집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법원은 그때 환경에선 그 판결이 정당했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 판결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그냥 부당한 것 아닐까요? 불법 구금을 입증할 자료, 국가의 기록들이 폐기됐다 해서, 개인의 피해가 사라지는 걸까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명백한 정당방위인데, 법원은 스스로 냈던 '오답'을 고칠 기회를 포기하겠다는 걸까요? 법원이 내세운 이유들은 여러 물음표를 남깁니다. 당사자인 최 씨도 물론 납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최 씨의 재심 신청 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습니다. 상고한 지 벌써 1년 8개월이 지났습니다. 여성단체들은 5월 한달간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재심을 해 달라며 시민들이 서명한 1만 5천 685장도 법원에 냈습니다. 마지막 1인 시위 주자는 77살 최말자씨 자신이었습니다.
    [서초동M본부] "18살 최말자는 무죄다"‥법원을 향해 '법'과 '양심'을 묻다
    최 씨를 만나 여기까지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최 씨가 인터뷰 도중 여러번 말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바로 '법'과 '양심'입니다. "양심이 있느냐"… "원래 맞는대로, 법대로 해 달라"

    최 씨는 59년 전 법과 상식에게 외면받은 자신의 오랜 아픔을 다시 한번 살펴봐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면서 법원을 향해 다시 묻습니다. "양심" 그리고 "법"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는 너무 억울해요. 국가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않습니까?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고. 양심이 있고 법대로 하려면 바로 잡아야죠. 나는 그렇게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잡아주기를."
    [서초동M본부] "18살 최말자는 무죄다"‥법원을 향해 '법'과 '양심'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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