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바인가? 예수인가?"
몰려든 군중 앞에 두 죄수를 놓고 로마의 총독이 물었습니다. 총독의 손엔 죄수 두 명의 운명이 놓여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 바라바와 메시아를 참칭한 죄로 재판에 넘겨진 예수 두 사람이었습니다. 모두 사형이 불가피한 중죄였습니다.
당시 총독은 유월절을 맞아 한 사람을 사면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총독이 누구를 선택하든 나머지 한 명은 사형에 처해질 상황. 통치 대상인 유대 민족의 불만이 터져나올 것은 분명했습니다. 유대지역에 불온한 기운이 퍼지던 시절, 영악한 총독은 군중에게 누구를 사면할지 물었습니다. 선택권과 함께 책임을 떠넘긴 겁니다.
"바라바요" 아마도 바라바의 세력이었을 군중이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총독이 재차 물자, 군중은 예수에게 극형을 내릴 것을 청합니다. "이에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더라"고 성서는 전합니다.
사면권, 군주의 은총에서 대통령의 권한으로
누구를 왜 풀어줄 것인가. 바리바의 사례에서 보듯 사면에 정치적 정략적 고려가 반영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면권자의 판단 만으로 특별히 누군가를 골라 판결을 백지로 되돌리는 만큼, 사면은 법을 초월한, 전제적 권한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현대의 사면제도는 영국 국왕이 죄인들에게 베푸는 은총인, 은사권에서 유래했습니다.
미국은 영국의 관습을 참고해 대통령의 사면권을 헌법에 집어 넣었습니다. 헌법 입안에 참여한 뉴욕주 대표 알렉산더 해밀턴은 불안정했던 미국의 정치 현실을 감안해, 국민 통합 목적의 사면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 적절히 주동자들을 사면하면 국가가 평온함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반면 연방정부의 권한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던 버지니아주 대표 조지 메이슨은 반대했습니다. 만약 대통령이 "동료의 반역죄를 용서해줄 수 있으면, (이들을 통해)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왕정을 세울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사면권을 의회와 나누는 방안도 논의됐지만, 이 아이디어는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사면 심사에 있어선 "신중하고 건전한 상식을 가진 한 개인의 결정이 다수보다 낫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결국 미국 헌법에선, 대통령이 탄핵을 제외하고 형의 집행유예 및 사면을 명할 수 있도록 강력한 권한을 부여합니다.
형평성 논란 끊이지 않는 대통령 특별 사면
문제는 그 '건전한 상식을 가진 한 개인', 즉 대통령의 결정이 정당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대통령 판단이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할 경우, 모든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똑같이 법을 지켜야 한다는 법치주의의 기초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미국을 따라 사면권을 도입한 우리나라도 이런 위험성은 마찬가지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005년 측근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과 안희정 씨를 사면하자 당시 야당으로 현 국민의힘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무권유죄 유권무죄'의 르네상스가 왔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어 정권이 바뀌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측근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박희태 전 국회의장을 특별 사면하자 공수가 바뀌었습니다. 현 민주당의 전신인 민주통합당은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사면권 남용"이라 날을 세웠습니다.
단 한 명을 위한 사면도 있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를 이유로 삼성 이건희 회장에 대한 '원포인트' 특사를 단행했습니다. 4백억대 조세포탈로 대법원에서 징역형이 확정된지 불과 넉달 만이었습니다. 한 사면위원은 "좀 밉고 속상해도 세계무대에 나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묶은 다리를 풀어주는 것이 맞다"는 이유를 댔습니다. 하지만 9년 뒤, 윤석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검찰 수사를 통해 사면에 부적절한 거래가 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삼성 이학수 전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 사면을 기대하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다스 관련 미국 소송비용을 지급했다"고 검찰에 자수했습니다.이건희보다 빨랐던 김태우 사면.."사법부 무력화
사면권 논란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광복절 특사로 김태우 전 서울 강서구청장 등 정치인들과 기무사 계엄문건 관련자들을 골라넣었습니다. 김태우 전 구청장은 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지 채 석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 사면보다 한달이나 더 빨리 대법원 판결을 무효로 돌린 겁니다. 김 전 구청장은 곧장 자신의 유죄 판결 때문에 치뤄지는 강서구청장 보궐 선거 예비후보로 등록했습니다.
야권은 "유죄 판결 잉크도 안 말랐다, 법치 유린"이라고 반발했습니다. 이례적으로 빠른 사면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신자용 법무부 검찰국장은 "수사와 재판이 4년이상 경과됐다"고 해명했습니다. 또 "김태우 전 구청장이 내부 고발했던 사건이 유죄 확정된 점을 감안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김태우 전 구청장이 공익제보자란 주장도, 또 일부 제보가 사실로 드러났다는 사정도 모두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모두 김 전 구청장 재판에서 다뤄졌는데도 마치 특별사면의 정당한 근거처럼 이용된 겁니다.
개인 비리로 감찰 받자 언론 제보 "공익 목적 아냐"
유능한 검찰 직원이던 김태우 전 구청장은 지난 정부시절인 2017년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특별감찰반에 파견돼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2018년 지인 사건에 개입하려던 일이 계기가 돼, 청와대 특감반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건설업자 최 모 씨는 국토부 뇌물 사건으로 경찰청 특수수사과에 소환되자, 이날 김 전 구청장은 과거 자신이 이첩한 첩보 진행상황을 확인한다며 해당 사무실을 방문합니다. 공교롭게도 경찰이 확보한 건설업자의 휴대전화에는 김 전 구청장이 접대를 받은 정황이 담겨 있었습니다.
김 전 구청장의 언론 제보는 이때 시작됩니다. 대검 감찰본부가 휴대전화를 압수하자, 이날 보관하고 있던 첩보보고서와 기자회견문을 기자에게 전달합니다. 이후 우윤근 전 주러시아 대사 금품수수 의혹 등 비위 첩보, 특감반 첩보보고서, 공항철도 직원 비리 첩보 등을 외부에 폭로했습니다. 검찰은 김 전 구청장이 폭로한 16건 가운데 일부는 공무상 비밀을 유출한 것이라고 보고 재판에 넘겼습니다.
1, 2, 3심 재판부 모두 "오로지 나라가 제대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익 신고를 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법원 "아무 문제를 제기하지 않다가 자신에 대한 감찰이 진행되자 각종 폭로를 시작한 점 등에 비춰보면, 폭로의 동기나 목적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의 주장에는 추측이나 과장이 상당 부분 개입돼 있다"고도 봤습니다. 실제 김 전 구청장이 제기한 우 전 대사 비위 등은 수사 끝에 무혐의로 종결됐습니다. 유재수 전 부산시 부시장 뇌물 비리 제보는 애초 기소 대상이 아니었고 다만, 일부 실체가 드러난 점을 양형에 반영해 죄질보다 가벼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했습니다.
'반헌법 범죄'에도 사면 단행 "정당성 훼손"
광복절 특사에는 소강원 전 국군기무사령부 참모장도 포함됐습니다. 소 전 참모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맞춰 군을 동원해 시위대를 통제하는 이른바 '계엄문건' 작성의 핵심 당사자 입니다. 다만 문건 작성을 지시한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의 미국 도피로 수사가 미진했을 뿐입니다. 대신 계엄 문건을 만들 때 가짜 조직을 만들어 야식비 등을 타낸 부수적인 혐의로만 기소돼, 지난 2월 벌금형이 확정됐습니다. 지난 3월 뒤늦게 조 전 사령관이 귀국해 계엄령 문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재개된 와중에, 핵심 관련자인 소 전 참모장이 사면된 겁니다.
앞서 신년 특사로 남은 형을 감형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지난 14일 이번엔 가석방으로 풀려났습니다. 2017년 윤석열 대통령이 지휘하는 국정원 수사팀은 원 전 원장시절 민간인 사찰과 정치 공작으로 얼룩진 국정원의 일탈 행위를 밝혀냈습니다. 당시 검찰은 "수많은 국민의 피땀으로 이룩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며 "사안의 엄중함을 고려해달라"고 중형 선고를 요청했고 사법부 역시 오랜 심리 끝에 "정보기관이 나서 특정 방향으로 여론을 형성하거나 견제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헌법 기본 질서에 명백히 어긋난다"고 최종 판단했습니다. 반헌법적이라는 법원의 질타에도, 원 전 원장은 마지막까지 정책적 판단이었다는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회의록도 불투명..심사 과정 개선해야
전문가들은 법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할 때, 법관의 오판을 교정해야할 때, 대통령의 사면권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면권의 원조인 영국은 지금도 국왕의 자비를 얻는 '사면'을 시행합니다. 교도소 직원을 야생 멧돼지의 공격에서 구한 수형자나, 테러범과 현장에서 맞서싸운 살인범죄자가 감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왕의 자비를 얻는 죄인은 연 평균 6명 안팎으로 많지 않습니다. 가난하거나 권력이 없는 서민들만 죄값을 치른다는 형평성 논란이 제기될 수 있어, 엄격한 기준을 대는 겁니다.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해 2차 대전에서 큰 공적을 올린 앨런 튜링조차 사후 59년 만에야 동성애로 처벌받았던 과거를 사면받았습니다.
이참에 우리의 사면 결정 과정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성균관대 법학연구원 김연진 선임연구원은 지난해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 이후 발표한 논문에서 사면 심사위원회를 강화하고 심사 과정을 공개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재 9명의 사면 심사위는 "과반수인 5명이 현직 공무원으로 구성돼 있어, 대통령 뜻에 맞는 심사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또 사면 과정이 공개되는 프랑스와 달리 우리는 심사회의록마저 특별사면 5년 뒤, 요약본으로 공개하고 있어 사후에도 심사 내막을 알기가 어려운 것도 문제입니다. 일본처럼 형기의 1/3이 경과한 뒤, 벌금형은 최소 1년 뒤 사면이 가능하도록 대상을 제한하는 방법도 거론됩니다.
정영우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삼권 분립 하에서 대통령에게 사면권을 부여한 것은 대통령이 국가 전체의 이익을 살피고 지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며 "법률의 취지나 관습을 넘어서 자기 집단의 정치적 이익의 위해 남용하게 되면 사면권 자체의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게 된다"고 우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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