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사무국은 2021년부터 매년 6월 2일을 ‘루 게릭 데이’로 지정해 루게릭병(근위축성측색경화증)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동시에 연구비 모금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올해 6월 2일에도 다양한 방식의 루 게릭 데이 행사가 열렸는데, 뉴욕 메츠의 홈구장인 시티 필드의 풍경은 조금 더 특별했다. 뉴욕 메츠 구단은 메이저리그 기록 전문가 사라 랭스를 초청해 경기 전 시구 행사를 가졌고, 랭스는 포수 뒤편 백스톱에서 환한 표정으로 남자 친구 맷 윌리엄스가 던지는 시구를 바라봤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였다.
사라 랭스는 메이저리그에 관한 세부 기록을 주기적으로 찾아보는 팬들이라면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정확히 시기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2010년대 중후반부터 랭스의 트위터 게시물은 소소하게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다른 사람이 찾기 어려운 희귀한 통계를 전달하는 이른바 ‘야구 기록 덕후’ 같은 모습이었다. 세이버메트릭스와 스탯캐스트를 접목해 찾아낸 특이한 정보도 많은 호응을 얻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랭스가 여성이라는 점도 현실적으로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이유 중 하나였다.)
랭스가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트위터 게시물의 생산량과 꾸준함이었다. 그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도 트위터에서 발생하는 알람을 지속해서 받게 되면 랭스의 열정과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위터 게시물이 점차 주류 언론 매체에 인용되면서 랭스의 유명세도 커졌다. MLB 네트워크 방송에 고정 출연하기 시작했고 ESPN의 베이스볼 투나잇 팟캐스트에서도 ‘The Numbers Game’ 코너를 통해 주기적으로 의견을 드러냈다.
통계와 기록을 다루는 전문가들이 활동 초기에 이름을 알리기 위해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흔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명성을 얻으면 사소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에는 주저하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의 입지를 고려해 일정 수준 이상의 형식을 갖춘 정보가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공유하기를 꺼리는 것이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랭스는 이런 면에서도 결이 조금 달랐다. 이미 충분한 인지도를 확보한 상태임에도 자신이 궁금한 것이라면 언제든, 무엇이든 경중을 가리지 않았다. 마치 야구라는 스포츠가 존재하는 한 마르지 않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랭스의 트윗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야구에서 발생하는 묘한 상황의 이면을 파고들어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소소한 기록을 찾아내고는 야구가 최고(‘Baseball is the best’)라는 말로 마무리하곤 했다. 랭스의 이 문구는 다른 종목과 가치를 비교하거나 우위를 논하려는 얄팍한 의도가 아니었다. 그저 야구라는 종교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전파하려는 선교사의 신실한 태도처럼 보였다.
도저히 멈출 것 같지 않던 랭스의 트윗이 한동안 뜸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신상의 변화일 수도, 혹은 어느 정도 전문가의 입지를 확보한 만큼 이제 업무량을 조절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 10월, 예상치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랭스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루게릭병을 앓고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만 28세의 나이였다. 순진무구해 보일 만큼 밝은 모습으로 온갖 세밀한 기록을 쉴 새 없이 소개하던 랭스이기에 더 충격적이었다. 그제야 방송에서 조금 어색해 보였던 말투가 단순히 느낌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루게릭병은 일반적으로 진단 후 생존 기간이 3~5년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진 만큼 많은 사람이 랭스의 소식에 대해 큰 안타까움을 전했다.
랭스는 2019년 특별한 이유 없이 발에 통증을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몇 차례 병원을 찾기도 했지만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한 랭스는 그저 발이 조금 불편한 것으로 여기고 하프 마라톤에 참가하기도 했다. 상황이 점차 악화하는 가운데 랭스는 1년 넘는 진료 끝에 자신의 통증이 루게릭병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낙담했지만, 동시에 랭스는 오랜 통증의 원인을 명확히 알게 됐다는 점에서 묘한 안도감도 느꼈다고 했다.
랭스가 투병 사실을 공개한 날은 2022년 10월 7일이었다. 포스트시즌이 시작되기 전, 경기가 열리지 않는 날에 알리는 것이 도리라 생각해 나름대로 정한 날짜라고 했다. 이후 랭스는 곧바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신변을 정리하거나 인생을 되돌아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껏 해오던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지속하는 방식으로 남은 삶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 과정은 작년 말 ‘디 애슬레틱’에서 보도한 관련 기사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랭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뉴욕 메츠의 팬으로 자라며 야구를 즐겼다. 매일 심야에 방송되는 ESPN의 베이스볼 투나잇을 본방사수하기 위해 밤잠을 늦추는 게 일상이었고,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선수로 올리버 페레스를 꼽기도 했다. 그리고 2015년 ESPN의 통계 관련 부서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덕업일치’를 이뤘다.
랭스가 ESPN에서 처음 업무를 시작한 날, 그의 책상 앞에는 루 게릭의 유명한 은퇴 연설문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랭스는 당시 별 이유 없이 그 장면을 휴대폰 사진으로 남겼다. 루 게릭의 2,132경기 연속 출전 기록이 중단된 날은 랭스의 생일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너무나 고약한 인연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조차 랭스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 랭스가 사진으로 남겼던 루 게릭 연설문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다. 랭스는 자신이 투병 사실을 알리자마자 지인들과 야구 관계자들은 물론 연락이 끊겼던 초등학교 친구에, 심지어는 일면식도 없는 수많은 야구팬으로부터 응원 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 말 그대로 친절함에 압도될 정도였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루 게릭처럼 랭스 자신도 너무나 감사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기상천외한 기록을 숱하게 공유해놓고도 어떻게 야구팬들이 자신을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해 의아해할 만큼 랭스는 평소 유명세에 대해 무심했다.)
그러면서 랭스는 한 가지 당부도 남겼다. 이미 떠난, 혹은 자신처럼 떠나갈 사람에게 보내는 호의적인 메시지도 물론 감사하지만, 바로 지금 건강하고 별일 없이 지내는 서로에게 같은 마음을 일상적으로 자주 전했으면 하는 바람을 적었다.
얄팍한 계산 없이 야구 자체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을 꾸밈없이 드러내 온 랭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도 복잡한 생각 대신 인간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퍼뜨리는 것으로 의미를 지속하려 하고 있다. 랭스는 운동 능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 지금도 여전히 트위터 게시물을 작성하고, ESPN 팟캐스트 고정 코너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밝은 목소리로 전하고 있다. 스포츠 현장에서 일어난 한 사람의 일에 지나치게 의미부여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숙하기만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랭스가 그동안 남긴 정보를 어떤 식으로든 접했을 야구팬들이 한 번쯤 기억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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