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들의 SNS에서 퍼 온 얼굴 사진에 나체 음란물을 합성하고 자세한 능욕 문구를 써 선거 포스터지처럼 꾸몄습니다. '기호 1번 육변기' '언제든 xx 가능'… 어설프게 합성한 수준이 아니라, '고퀄리티' 사진들이었습니다. 피해를 보고 지인 합성물이란 걸 처음 알게 됐습니다."
-음란물 합성 피해자 (MBC와 통화)-
같은 대학 여학생의 얼굴 사진을 음란물에 합성해 보관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대학생 이 모 씨. 범행은 정말 우연히 발각됐습니다. 지난 2017년 12월, 이 씨가 지하철에서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는데, 주운 사람이 합성 음란물 사진들을 발견한 겁니다. 주운 사람은 이 씨가 아닌 피해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이 씨는 "늘 감사하다" "합성 부탁드린다"며 누군가의 사진과 이름, 심지어는 실제 전화번호나 주소까지 익명의 트위터 계정에 적어 보냈습니다. 원하는 얼굴과 음란물을 합성해주는 이른바 '지인능욕' 계정이었습니다.
한 피해자는 MBC와 전화 통화에서, "이 씨와 알고 지내던 20대 초반 여성 지인들이 거의 다 피해자였다"고 말했습니다. 학과 절친부터 동아리 선·후배 사이, 고등학교 동창이나 같은 학원에 다녔던 사이까지… 당시 모였던 피해자만 20명 가량 됐습니다. 이들은 '한양대 남학생의 지인 사진을 이용한 음란물 제작사건 피해자 모임'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 사건을 알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퇴학 조처와 공개 사과문 게시를 촉구했습니다.
대법원에서 뒤짚힌 판결 "무죄"…"옛 법으로 처벌 못 해"
결국 2018년 퇴학 조치된 이 씨는 곧바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 검찰이 수사를 맡았습니다. 지인 사진을 이용한 합성 음란물 제작은 '신종 성범죄'였습니다. 수사기관은 현행법상 명확하게 처벌 규정이 없는 이 신종 범죄에 대해 '음화제조교사죄'가 적용됐습니다. '지인능욕' 계정에 음란물 합성을 의뢰했으니, "음란한 물건을 만들게 시켰다"는 죄를 적용한 겁니다.
1심과 2심 재판을 맡은 군사법원은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심리 4년 만에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습니다.대법원은 옛 법으론 이 씨를 처벌할 수 없다는 직권 판단을 내놨습니다. 이 씨가 의뢰해 만든 음란합성 사진은 '컴퓨터 프로그램 파일'로, 형법 244조에서 규정한 '음란한 물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형법이 규정한 '음란한 물건'은 문서, 도화, 필름 기타 물건만 포함된다는 겁니다. 컴퓨터 파일이 문서나 그림처럼 공유되는 현실과는 사뭇 동떨어진 판결입니다. 기술 발달에 따라 등장한 신종 범죄를 처벌 못 한 법적 공백이 생긴 셈입니다.
이 씨는 불법촬영 혐의로도 함께 기소됐는데, 이 또한 무죄로 뒤집혔습니다. 피해자로부터 이 씨 휴대전화를 받아 영장 없이 압수했고, 포렌식 과정에서 참여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 등 절차가 위법했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대법원이 이렇게 대부분 혐의를 모두 무죄로 판단하면서, 이 씨는 피해자 1명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서만 다시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이 씨를 변호한 김정환 변호사는 "피해자들에게 송구한 마음"이라면서도 "민간 경찰부터 군검사, 군판사조차 영장을 위법하게 발부해 실형을 살게 된 사례로, 적법절차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점에서 무죄가 선고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성명불상자에게 의뢰해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딥페이크 합성물 범죄에서, 단순 소지만으론 목적이 증명되지 않아 여전히 처벌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습니다.
선고 결과를 접한 피해자는 "점점 발전하는 기술과 처벌과의 시차가 크다"며 "피해자가 많고 공론화가 돼 많은 관심을 받았던 사건인데도 시대에 뒤떨어진 판결이 나온 것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뒤늦은 '딥페이크 처벌법' 도입…이제는 엄벌 이뤄지나?
처벌할 규정이 없어 이 씨는 법망을 피해 갔습니다. 다만, 늦게나마 지인이나 연예인,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음란물과 합성하는 신종 성범죄도 처벌하도록 한 이른바 '딥페이크 처벌법'이 2020년 도입됐습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의2' 반포할 목적으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허위 영상물을 제작하거나 퍼뜨리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 영리 목적이었다면 7년 이하의 징역으로 가중 처벌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새 법 시행 3년 6개월째, 지금은 엄벌이 이뤄지고 있을까요?대법원 판결서 열람을 통해, 지난해까지 새 법이 적용돼 기소된 1·2심 판결문 71건을 전수 분석했습니다. 확인한 판결문 중 1건을 뺀 70건이 유죄였습니다. 성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경각심이 높아진만큼, 벌금형 없이 모두 징역형이었습니다. 하지만, 절반인 35건이 집행유예였습니다.
1) "'몸합' 연예인 1천 원, 지인 2천 원" "'벗기기' 연예인 2천 원, 지인 2천5백 원"…
텔레그램 계정을 직접 운영하면서 입장권 판매 글을 올리고, 의뢰받은 허위영상물을 제작해 전송한 디지털 성범죄자.
"혼자 어머니를 부양하고 있다", "벌금을 넘어서는 형사처분 전력이 없다"는 이유로, 법원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고, 1백20만 원의 범죄 수익금 추징을 명령했습니다. (청주지법)
2) 친구의 전 여자친구, 지인 등 11명의 피해자 얼굴을 석 달 동안 52차례 성행위 하는 사진 등에 오려 붙여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올린 음란물 합성 범죄자.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98개를 내려받아 가지고 있던 혐의도 함께 적발됐지만…
"우울증으로 현역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고, 전역 후 고립된 생활로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행했다", "실형 선고보다는 치료명령이 재범 방지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광주지법)
이 성범죄자가 만든 합성 음란물 중에는 동공이 위로 올라간 채 안면에 홍조를 띤 여성의 얼굴을 뜻하는, 인터넷 용어 '아헤가오'를 표현한 사진도 있었는데, 이 합성물에 대해선 1심과 2심에서 잇따라 무죄 판단이 나왔습니다.
"건전한 사회통념을 가진 보통의 일반인이 이 사진을 보고 곧바로 해당 여성이 성적 흥분상태에 빠진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광주고법) 법원은 다른 사건에선 "영리 목적이 아니"라거나, 돈을 받고 합성물을 팔았어도 "경제적 이익이 크지 않았다"는 점 등이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해 역시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합성음란물 구독' 정기 제공해도…"직접 촬영 아니다" 선처
3) "실제 성 착취 행위는 없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텔레그램 채널을 운영하며 매월 10달러에서 30달러에 합성 음란물 구독서비스를 제공한 피고인. 아동·성 착취물 1백여 개, 성인 허위영상물 588개를 만들어 661만 원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직접 촬영한 사진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법익 침해 정도가 무겁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범죄수익 추징과 함께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습니다. (제주지법)
오선희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위원회)는 "피해자의 진짜 신체를 찍지 않았으니 덜 중한 범죄라며 그 자체를 양형 요소로 평가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실형이 선고된 절반 중 31건은 다른 성범죄까지 함께 저지른 경우였습니다. 여러 범죄를 함께 저지른 경우다보니, 음란물 합성에 대한 법원 판단을 확인하긴 어려웠습니다.
오직 음란물 합성만으로만 실형이 선고된 건 4건에 그쳤습니다. 법원은 이 중 한 판결문에서 "디지털 매체 특성상 한 번 유포되면 일일이 찾아 삭제가 어려워, 완전한 피해 회복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적시했습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새 법 시행 뒤에는 엄벌이 이뤄지고 있을까요? 판결문 분석을 통해 찾은 답은 이랬습니다. "진짜 신체를 안 찍었다", "경제적 이익이 없다"며 선처한 판결은 35건이었고, "피해회복이 어렵다"며 엄벌한 판결은 4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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