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대란 상황에서 '응급실 뺑뺑이'에 온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만 그만큼, 어쩌면 더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암환자'들입니다.
■ "서울대암병원 일부 진료센터 '신환' 안 받아‥암 수술 축소돼 있던 환자도 다른 병원 보내"
한세원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서울대암병원 일부 진료센터(종양내과센터 등)는 전공의들이 사직한 이후 '신환'(신규 환자)을 더 이상 받지 않고 있다. 얼마 안 되는 교수진 만으로는 기존 환자들을 돌보기도 버거워 수술이 대폭 축소되거나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한세원 교수는 "암 수술은 한 달 이상 지연되면 안 되기 때문에 기존에 있던 환자들도 다른 곳을 소개해주고 2차 병원으로 전원 보내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암 치료는 외과, 종양내과, 방사선종양학과, 마취과, 영상의학과, 병리과 등이 다학제 협진으로 한 팀을 이루어야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있습니다.
암의 병기를 판단하고, 선제적으로 암 크기를 줄이는 방사선 치료를 할지 아니면 수술을 먼저 할지, 수술 후 보조적 항암은 얼마 동안 할지 등을 다학제 연구, 진료과들이 모여 협진을 통해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이 중 어느 한 과라도 빠지면 암 환자를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이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해온 각 진료과의 전공의들이 모두 빠져나간 지금 상황은 그야말로 총제적 난국입니다."
'응급실 뺑뺑이'와 '암환자', 어느 쪽이 더 심각한 상황이냐는 우문을 던지자 한세원 교수는 "뭐가 더 눈에 드러나냐의 차이일 뿐, 다 심각하다"고 말했습니다.
"암 환자들은 오늘 당장 돌아가시지는 않으니까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응급실 뺑뺑이'와는 달리 체감하지 못할 뿐, 의료공백 사태로 인해 피해보는 환자 수는 훨씬 더 많다"는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 "명의 기다리지 말고 바로 수술받으라는 암인데‥아산병원 췌장암 외래 1년 연기"
췌장암은 암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암으로 꼽힙니다.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조기 발견이 어렵고 재발도 잘 되는데다 5년 생존율은 15%로 10대 암 중 가장 낮습니다. 되도록 건강검진 등을 통해 일찍 찾아내고, 발견되면 빨리 수술을 받는 것이 그래서 더욱 중요한 암입니다.
그런데 의정 갈등이 8개월 이어지면서 췌장암은 진단부터 줄줄이 연기되고 있습니다.
췌장염이 반복돼 췌장암이 의심되니 큰 병원에 가보라는 동네 병원의 이야기를 들은 50대 남성은 6개월 전 'BIG 5' 가운데 하나인 서울 아산병원 내과에 외래 진료예약을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의정갈등으로 인해 외래 진료가 연기되었으니 1년 후에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미 6개월을 대기했는데 다시 1년이 밀린다니 답답하고 불안하지만 다른 병원들 사정도 대동소이할 것 같아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일부 췌장암 환자 지방 보내고 있다..수술 늦어지면 예후 안 좋아"
췌장암 수술을 맡고 있는 간담도췌외과의 사정도 심각합니다. 전공의가 없어 교수 혼자 PA간호사들과 수술을 해야 하고, 수술 후 환자가 회복되는 경과까지 다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수술방을 많이 열어서 하루에 여러 건의 수술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의정 갈등이 시작된 이후 췌장암 수술 예약은 2달, 3달 점점 늦어졌고 의정 갈등이 8개월째로 접어든 현재는 췌장암 수술을 받으려면 내년 3월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합니다.
‘BIG 5’ 병원에 근무하는 간담췌외과 교수는 “환자들에게 췌장암은 명의 찾지 말고 빨리 수술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지방에서 가능한 병원이 있으면 거기서 받으시라고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꼭 제게 수술받아야겠다는 분들은 내년까지 기다리셔야 한다고 설명드리고 있는데 췌장암은 특히 수술이 늦어지면 예후가 좋지 않기 때문에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이 교수는 “전공의가 빠져버리면서 그동안 숨어 있었던 필수의료의 구조적 문제가 다 드러난 것인데, 거의 '대기 없이 빨리 진료받고 빨리 수술받았던' 대한민국 의료체계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면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 "췌장암 한 달 안에 수술 안 받으면 사망률 1.23배 증가 <서울의대>"
암 수술을 빨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실제 연구 결과로도 나와 있습니다.
서울의대 윤영호, 노동영, 허대석 교수팀이 2012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암 진단 후 1개월 이상 수술을 기다린 환자는 1개월 이내 수술을 받은 환자에 비해 유방암은 1.59배, 직장암 1.28배, 췌장암은 1.23배 사망률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미국에서 나온 연구 결과도 비슷합니다. (시카고대, 아이오와 의대)
<암 수술 안전 지연 기간>은 대장암· 폐암 · 위암이 5주, 유방암은 최대 6주였고, 췌장암은 3주로 가장 짧았습니다.
웬만하면 한 달 안에는 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의정갈등 때문에 췌장암 수술을 올해 연말도 아니고 내년 봄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니...
누구나 환자가 될 수 있고,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의료공백 사태가 나와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고 넘길 수 없는 상황입니다.
■ "암 환자 '회피가능사망률' 2~3년 후에‥그땐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텐데.."
'응급실 뺑뺑이'가 지금 눈에 보이는 위급한 상황이지만, 중증질환인 암환자들의 치료도 그에 못지않게 시급한 문제이고 이렇게 방치하면 '회피가능사망률'은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세원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의료공백 사태로 인한 암 환자 사망률은 통계적으로 금방 잡히지가 않고 2~3년 후에나 영향을 알 수 있을 텐데.. 지나간 다음에는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것 아니냐"며 탄식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다 예상이 됐으니까.. 의정갈등 초기부터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던 것인데 이 일을 어찌할 것인지 눈앞이 캄캄합니다.
의료개혁을 하더라도 일단 환자부터 살려놓고 개혁해야 하는데.. 국민 전체에 비하면 암 환자는 일부에 지나지 않겠지만 제가 돌보고 있는 암 환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암 환자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회피할 수 있었던 사망을 어떡할 겁니까..."
한 교수의 마지막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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