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표 보조'를 아시나요?
오늘은 재·보궐선거 본투표일입니다. 오전 6시부터 투표가 한창이죠. 5개 선거구에서만 이뤄지는 데다 휴일도 아닌 만큼 모르고 지나가기 쉬울 겁니다. 그런데 일부러 시간 내 투표소를 찾고도 한 표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한 이들도 존재합니다.
지난 지방선거 때 투표를 하러 간 한 모 씨. 중증 발달장애인으로, 공적 선거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사가 큽니다. 본인 의사로 후보를 정하는 것은 물론, 물리적으로 '도장을 찍는' 행위 역시 가능합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습니다. 낯선 사람과 환경에 두려움을 느끼는 만큼, 익숙한 인물이 곁에서 돕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우리나라 헌법과 선거법은 지적 수준이나 장애 유무로 선거권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비밀선거의 원칙이 존재하죠. 그렇다면 한 씨의 참정권은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요?
선거법은 이렇게 정해두었습니다.
[ '투표 보조' ]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6항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의 경우,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이 투표를 보조할 수 있게끔 한다.
한 씨와 그의 어머니는 투표사무원에게 가로막혔습니다. 한 씨가 시각 장애, 또는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선거법 조항을 근거로 한 선거관리위원회 투표관리 지침상 보조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침에는 '장애등록 여부, 청각·발달 등 장애 유형과 무관하게 혼자 기표할 수 없다는 걸 설명하면 이를 적극 고려하라'고 돼 있었습니다. 어떤 장애를 가졌든간에 투표 도장을 혼자 찍을 수 없다는 점이 인정돼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한 씨의 경우 직접 도장을 찍는 게 가능하니 보조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죠.
■ '찍을' 수만 있다면 괜찮은 건가요?
글씨만 빼곡한, 최장 0.5미터의 투표 용지.
처음 보는 사람들 속에서 정해진 순서에 맞춰 오고 가야 하는 투표소의 풍경.
자주 겪는 일도 아닌 만큼, 이런 상황 속에서 발달장애인들의 경우 유권자로서 본인이 진정 원하는 선택을 하는 건 어렵습니다.
그래서 투표 보조인을 법으로도 규정해 둔 건데요. 한 씨처럼 보조를 요청하고도 거부당한 사례, 장애인권단체에서 그 수를 모아보니 두 손으로 못 셀 정도였습니다.
늘 그랬던 건 아닙니다. 지난 2016년 이후 발달장애인 유권자들은 선관위 지침에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명기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연 선관위가 이 내용을 삭제했습니다. 선거법에 어긋난다는 겁니다. 2020년 4월 제21대 총선부터 시각장애나 신체 장애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발달장애인들은 다시 투표 보조를 거부당하기 시작했습니다. 12명의 당사자가 모여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고, 이듬해 인권위가 고치라고 '권고' 결정을 했지만 선관위는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이들이 법원에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에 대한 긴급구제를 요청하는 임시조치를 신청하자,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선관위는 장애 유형을 가리지 않는 앞선 내용대로 선거지침을 개정하고, 대선 때도 발달장애인들이 투표 보조를 받도록 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 갈 길 먼 장애인 참정권‥그래도 소중한 '1승'
하지만 현실에선 달라진 게 없었죠. 투표 보조 거부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한 씨와, 역시 대선 때 '투표 보조 거부'를 경험한 또 다른 발달장애인 노 모 씨는 지난해 3월 국가를 상대로 차별구제소송을 냈습니다. 그리고 1년 7개월 만인 지난 10일 승소했습니다. 유사한 취지의 소송 가운데 첫 승리였습니다.
1분 남짓의 짧은 선고가 끝나고, 법률 대리인이 작은 목소리로 그 의미를 설명하자 방청석 곳곳에선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기쁨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높게 드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제29민사부는 헌법상 권리인 참정권을 바탕으로 해석했을 때, 공직선거법 규정의 '시각 또는 신체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에 발달장애 등 정신적 장애로 인해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사람도 포함된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선관위는 '법령에 시각·신체장애만 적혀 있으니 발달장애인은 이러한 장애가 없는 한 투표 보조가 안 된다'고 봤지만, 1심 법원은 발달장애 등 정신적 장애를 투표 보조 대상에 기본적으로 포함하라고 판단한 겁니다.
재판부는 선거법의 해당 조항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2007년과 발달장애인법이 제정된 2014년 이전인 1994년부터 있었던 점도 짚었습니다. 선거법 조항을 만들 때 시각·신체 장애만 적어둔 것이 일부러 정신적 장애, 발달장애 선거인을 배제할 의도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발달장애인의 경우 '투표소와 같은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는 더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며, '투표 보조로 도움을 받아야만 의사에 부합하는 투표를 할 수 있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투표사무원이 현장에서 단시간에 투표 보조 요청인이 과연 기표할 수 없을 정도의 신체 장애를 가지고 있는지 판별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고도 설명했습니다.
1심 법원은 판결 확정일 이후 선거관리위원회가 관리하는 선거와 국민투표의 투표관리지침에, '발달장애로 인해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도 (투표 보조 허용 대상에) 포함된다'고 명시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큰 변화입니다. 다만 투표용지에 후보자 사진을 넣거나, 주요 공약을 그림으로 그린 선거 공보물을 제공하는 국가도 있는 걸 생각했을 때 갈 길이 멀죠.
장애인권단체에는 지난 11~12일 사전 투표 중에도 각지에서 투표 보조를 거부당했다는 발달장애인들의 제보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오늘 선거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요?
10일 선고 직후 기자회견 중 장애인권단체 대표의 발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의 권리가 정당함을 판결해 주신 법원에 감사합니다. 정부가 항소하면 또 재판이 길어지기 때문에 마냥 기뻐할 수가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권리를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또 우리의 권리를 찾아서 지치지 않고 투쟁할 것입니다.
[박김영희/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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