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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훈칠의 맥스MLB] 배리 본즈는 왜 그때 삼진을 당했을까?

[전훈칠의 맥스MLB] 배리 본즈는 왜 그때 삼진을 당했을까?
입력 2019-01-17 13:48 | 수정 2020-09-15 09:56
2002년 10월 26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애너하임 에인절스의 월드시리즈 6차전.

먼저 3승을 거둔 샌프란시스코는 이 날도 5회까지 3대 0으로 앞섰다. 6회초엔 당대 최고의 타자 배리 본즈가 떠오르는 신예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을 뽑았다. 높은 슬라이더를, 흔히 말해 '받쳐 놓고 때린' 홈런. 별다른 세리머니없이 타구를 바라보다 베이스를 돌기 시작한 본즈가 홈을 밟으면서 4대 0.

본즈는 7회초에도 등장했다. 제프 켄트의 적시타로 5대 0이 된 다음이었다. 투아웃 1루 상황에서 이번에는 바닥에 떨어지는 변화구를 참지 못하고 큰 스윙으로 허망하게 삼진을 당했다. 상관없었다. 이미 고의 4구, 볼넷, 홈런으로 앞선 세 타석에서 자신의 위엄을 한껏 과시한 뒤였다. 이제 샌프란시스코는 아웃카운트 9개만 잡아내면 뉴욕 자이언츠 시절 이후 58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이고, 무엇보다 천하의 본즈가 드디어 반지를 얻는 순간이라는 점이 대중과 언론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다음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7회말 스피지오의 석 점 홈런, 8회말 어스태드의 솔로포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후 개럿 앤더슨의 안타 때 공을 두 번 더듬고 미끄러지면서 휘청인 본즈는, 글로스의 2타점 2루타가 된 타구에 다시 공을 더듬으며 체면을 심하게 구겼다. 경기는 역전패로 끝났고, 그대로 7차전까지 내주면서 평생 꿈꿔온 반지가 날아갔다.

개인적으로 배리 본즈를 떠올릴 때마다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본즈는 2003년 디비전시리즈를 마지막으로 가을 야구 무대를 밟지 못했다. 끝내 반지는 얻지 못했고, 오히려 불명예 은퇴했다. 본즈는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자신의 기대만큼 인정받지 못한 채 보냈다. '약물 청정 시기'로 인식되는 피츠버그 시절은 물론, 샌프란시스코에서 신적인 능력을 보여줄 때도 그랬다. 2002년 월드시리즈 이전까지 이미 네 차례 MVP를 수상했지만, 그와 별개로 본즈 자신은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느꼈다. 그럴수록 더 개인 성적에 몰두했고 반지에 집착했다.

이런 본즈의 이면을 이해하려는 이들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작용한 결과로 설명하곤 한다. 배리 본즈의 아버지 바비 본즈는 70년대 활약한 대표적인 '5툴 플레이어'였다. 특히 30홈런-30도루를 다섯 차례나 기록했을 정도로 파워와 스피드가 돋보였다. ('30-30'을 다섯 번 달성한 선수는 바비 본즈 이외에 한 명 뿐이다. 배리 본즈다.) 삼진왕으로 불리긴 했지만 올스타 3회, 골드글러브 3회로 스타급 선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경기장 밖에서는 그리 훌륭한 인물이 아니었다. 폭음에 줄담배가 바비 본즈를 설명하는 가장 흔한 단어였고 사생활 문제로 구단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좌충우돌하는 성격 탓에 구단주와 단장, 언론과 팬은 물론 동료들까지 바비 본즈와 등을 돌렸다는 평이 나왔다. 1975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이후부터 거의 매년 팀을 옮기다시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간혹 인종 차별로 부당하게 비난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배리 본즈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경기 외적인 이유로 소외받는 장면을 지켜봤다. 본즈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지인들은 본즈가 인정받기 위해서 오직 실력으로만 승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고 말한다. 아들이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자 바비 본즈는 직접 슈퍼스타를 키워내려 애를 썼다. 팀의 선배이자 아들의 '대부'인 윌리 메이스와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 여러 장점을 접할 수 있도록 했고, 집에서는 전력 투구로 아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주기도 했다. 바비 본즈는 슈퍼스타가 되기 위해선 실력 이상의 무언가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예를 들면 태도나 말투에도 일종의 '스웨그'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배리 본즈가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태도 논란에 휩싸였다고 본 사람들은 이 역시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기곤 한다.
본즈는 고교 졸업 후 곧바로 프로에 진출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7만 달러의 계약금을 제시했으나 본즈가 7만 5천 달러를 요구하면서 협상이 결렬돼 애리조나 주립대로 진학했다. 이후 피츠버그에 입단한 본즈는 무리 없이 빅리그에 적응했고, 동료들이 일찌감치 '명예의 전당감'이라 여겼을 만큼 탁월한 기량을 펼쳤다. 그러나 배리 본즈 역시 그라운드 밖에서는 내성적인 편이었고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종종 주위 사람들을 당황시켰다고 한다. 바비 본즈는 아들이 경기에 집중하려다 오해를 사는 것이라 변호했지만 주위의 생각은 달랐다. 팀의 승패보다 자신의 기록을 중시하는 선수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본즈는 당시 동료 외야수 앤디 반 슬라이크가 '미스터 피츠버그'로 불리며 팀의 간판으로 대접받는 것을 불편하게 받아들였다. 반 슬라이크를 '위대한 백인들의 영웅'이라 부르며 시기심을 드러낸 적도 있다. 본즈는 90년부터 3년 연속 팀을 가을야구로 이끌기도 했지만 포스트시즌에서 크게 부진해 영웅이 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첫 FA 자격을 얻은 시점에서 피츠버그의 제시액에 실망해 팀을 떠나기로 했다.

"여러분, 좋은 소식입니다.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액입니다. 배리 본즈가 6년간 4천 3백만 달러에 자이언츠와 계약했습니다." 본즈의 샌프란시스코 행은 지역 방송에서 뉴스 속보로 전해졌다. 입단식에서 본즈는 "어린 시절 꿈을 이뤘다"며 눈물까지 흘렸다. 본즈는 아버지의 등번호 25번을 물려받았고, 샌프란시스코 구단은 바비 본즈를 1루 코치 겸 타격 코치로 채용해 본즈 부자가 경기 중 1루에 나란히 선 모습을 연출했다. 본즈는 이적 후 첫 홈경기의 첫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 팬들을 열광시켰고 팀도 극적으로 승리했다. 확실한 동기부여를 통해 본즈는 이적 첫 해를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마무리했다. 모두들 완벽한 성공을 예감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2000년까지 가을야구는 딱 두 번 더 나갔을 뿐이었고 그마저 디비전 시리즈를 넘지 못했다. "우승 대신 본즈를 가졌다"며 자부심을 드러낸 팬들도 있었지만 본즈로서는 여전히 갈증을 풀기 어려웠다.
이 와중에 본즈의 인생 흐름을 바꾼 또 하나의 사건이 등장했다. 98시즌, 맥과이어와 소사의 이른바 '홈런 빅뱅'이다. 애리조나와 탬파베이 등 신생팀의 가세로 엷어진 투수층, 타자 친화적인 신구장들의 건설, 심지어 파업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한 MLB 사무국의 포석까지 다양한 원인 분석이 있지만, 중요한 건 맥과이어와 소사가 야구를 '홈런의 게임'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거포의 경기 전 타격 연습을 보기 위해 관중이 몰리는 진풍경이 펼쳐졌고, 맥과이어가 타격 연습의 첫 공에 번트를 대는 루틴을 소화하면 팬들이 장난 섞인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맥과이어가 피츠버그 원정에 나섰을 때는 쓰리 리버스 스타디움이 27년 만에 이틀 연속 매진됐을 정도였다. 외향적이고 화통한 성격에 폭발적인 홈런포를 뿜어낸 소사도 시카고에서 마이클 조던 급 인사가 됐다. '천만 불짜리 미소'라는 낯간지러운 수식어가 따라다녔고, 더그아웃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나와 리글리 필드 우익수 담장 앞에서 관중을 향해 경례하는 장면에 팬들은 열광했다. 미국은 물론 중남미 대다수의 국가에서 맥과이어와 소사의 홈런은 매일 뉴스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도 당시 지상파 스포츠뉴스가 연일 맥과이어와 소사의 홈런 경쟁을 전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맥과이어의 사물함에서 안드로스텐다이온이 발견돼 잠시 논란이 있었지만 팬들의 환호 속에 묻혔다. 사회적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안드로스텐다이온은 아스피린이나 커피 수준"이라는 칼럼이 게시되는가 하면, 맥과이어의 사물함을 훔쳐 본 AP 뉴스의 윌스타인 기자에겐 클럽하우스 출입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비난도 나왔다. 안드로스텐다이온은 NFL이나 IOC에서 이미 금지된 성분이었지만 MLB는 아니었다. 유야무야 홈런 경쟁이 재개됐다. 맥과이어와 소사의 맞대결이 벌어진 날엔 내야 지정석보다 좌익수쪽 외야석이 더 비싼 경우마저 생겼다. 맥과이어는 70홈런 신기록을 세웠고, 66홈런으로 마감한 소사는 시즌 MVP를 수상한 뒤 도미니카에서 국빈 대접을 받았다. 뉴욕 타임스는 "98시즌 메이저리그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우울증 치료제 노릇을 했다"고 썼다. 어찌 됐건 약은 약이긴 했다.

모두 축제인데 배리 본즈는 즐겁지 않았다. '역대 최고의 만능선수'가 목표였고 전무후무한 400홈런 400도루를 달성했지만 모두 홈런 기록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누구도 본즈를 최고의 선수라고 부르지 않았다. 좌절감을 맛본 본즈는 이듬 해 근육으로만 10킬로그램 가까이 몸을 불린 채 스프링캠프에 나타났다. 홈런 타자로 서서히 변모한 본즈는 2000년에 자신의 한 시즌 최다인 49홈런을 기록했다. 힘이 빠져야 할 나이에 다른 선수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올라섰다. 여전히 물증은 없지만 이 시기에 약물을 접한 것으로 여겨진다.

맥과이어나 소사와 달리 섬세한 선구안과 경기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까지 갖춘 본즈는 더 질주했다. 2001년에는 전반기에만 39홈런을 터뜨려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갈아치울 후보로 꼽히기 시작했다. 본즈는 바깥쪽 코스를 제대로 찌른 랜디 존슨의 강속구도 여유 있게 밀어쳐 넘길 만큼 경지에 올랐고, 상대팀들은 고민 없이 고의4구를 택하곤 했다. 이 시기에 본즈는 자신의 평판을 바꾸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경기장 밖에서 팬들과 스킨십 하는 장면을 연출했고, 홈팬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결국 9.11 테러의 충격을 벗어나게 해준 존재로까지 평가받으며 73홈런 단일 시즌 신기록을 작성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월드시리즈 우승은 본즈에게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목표였다. 우승만 아니면 당장 은퇴해도 아쉬움이 없다고 했다. 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은 물론이고, 큰 무대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려는 욕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피츠버그 시절 포스트시즌에서 부진했던 과거는 자신의 평가에서 씻기 어려운 흑역사였다. 기회가 왔다. 2002년 양대 리그 와일드카드 팀끼리 만난 월드시리즈. 본즈는 정말 예전과 달랐다.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홈런으로 만들 수 있을 것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시리즈 내내 보여줬다. 타격왕을 차지한 시즌에 월드시리즈에 나갔던 선수가 역대 모두 37명인데, 본즈는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0.471의 월드시리즈 타율을 찍었다. 30타석에 나서 무려 13개의 볼넷을 얻을 정도로 집중 견제를 받으면서도 홈런 네 방을 날렸다. 괴물이었다. 결과적으로 괴물 한 명으로는 부족했다.

너무 멀리 돌아왔다. 다시 2002년 10월 26일 월드시리즈 6차전으로 가본다. 7회에 5대 0. 샌프란시스코의 우승을 의심하는 분위기는 찾을 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불펜 투수들은 경기가 끝나면 그라운드의 어떤 방향으로 뛰어갈지 대화중이었다.

7회초 본즈의 삼진도 비슷한 분위기 속에 당한 것처럼 보인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우승 자축포를 터뜨려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한 영웅 스윙이었을 수도 있고, (행여 그럴 리 없겠지만) 농담처럼 말하곤 하는 '퇴근 본능'이었다 해도 납득이 간다. 물론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의 변화구에 어이없이 허를 찔린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본즈가 월드시리즈 내내 보여준 초인적인 집중력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거짓말처럼 곧바로 운명이 바뀌었다. 하나의 삼진이 달라질 운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본즈의 인생을 다룬 베스트셀러 'Love me, Hate me' 에서는 월드시리즈 6차전이 열린 10월 26일을 이렇게 정리했다. '본즈를 증오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날.'
일곱 차례 MVP에 통산 최다 762홈런. 여기에 단일 시즌 232볼넷과 고의 4구 120개는 본즈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수많은 '약쟁이' 선수가 있다지만 누구도 본즈 수준에 근접조차 하지 못했다. 굳이 정의하자면 '약신(藥神)'이라고나 할까. 숱한 대기록을 남기고도 옹호 받을 수 없는 선수가 된 본즈. 이제 본즈에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명예의 전당이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우호적인 분위기가 늘어난 것만은 틀림없다. 결국 예년처럼 씁쓸하게 돌아서든, 아니면 극적으로 구제되든, 논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본즈가 원하는 진정한 명예는 끝까지 얻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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