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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훈칠의 맥스MLB] '19번째 남자'를 아십니까?

[전훈칠의 맥스MLB] '19번째 남자'를 아십니까?
입력 2019-08-16 11:16 | 수정 2020-09-15 09:53
영화 '19번째 남자 (Bull Durham, 1988)'

영화 '19번째 남자 (Bull Durham, 1988)'

메이저리그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메이저리그 관련 영화도 한 번쯤 찾아봤을 것이다. 야구와 영화, 두 분야에서 세계를 대표하는 나라가 미국인만큼 메이저리그를 소재로 한 영화는 당연히 무궁무진하다. 이 가운데 미국 내에서 최고의 야구 영화를 꼽을 때 최상위권에 빠지지 않는 영화가 바로 '19번째 남자 (Bull Durham)'다.

영화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드러난다. 피트 로즈,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재키 로빈슨, 그리고 최단신 선수 에디 개델과 베이브 루스 등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낯설지 않은 인물들을 나열하며 막을 연다. 영화의 첫 대사조차 "난 야구라는 종교를 믿는다." (I believe in the church of baseball.) 는 수준이니 말 다했다.

영화는 마이너리그 구단 '더램 불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공은 빠르지만 제구력이 형편없는 유망주 투수(팀 로빈스), 그 투수의 경기력과 인성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 영입된 노장 포수(케빈 코스트너), 그리고 이들을 애정 어린 시각으로 관찰하는 인물(수잔 서랜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설정 자체는 조금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다른 스포츠 영화와는 조금 결이 달라 눈길이 간다.

마이너리그를 배경으로 한 영화지만 빅리그 승격에 대한 갈망이나 신화 같은 성공담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영화는 80년대 마이너리그의 일상적인 모습을 소탈하게 전하는 데에만 공들인다. 승리나 기록, 우승보다 선수들이 인간적으로 갈등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현실감 있게 표현한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을 여성 주인공의 관점에서 풀어간 것도 당시로서는 신선한 접근이었다.
스포츠영화의 시각을 선수 중심으로 바꾼 영화

스포츠영화의 시각을 선수 중심으로 바꾼 영화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소탈한 마이너리그 라커룸의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선수들이 경기 후 시간을 보내는 근처 술집의 능청스러운 풍경, 그리고 버스에 단체로 몸을 구겨 넣고 장거리 원정을 겪는 사이 벌어지는 일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메이저리그를 21일 동안 경험하고 온 선수가 "거기에선 가방도 남들이 들어주고, 타격 연습도 흰 공으로 한다"는 무용담을 늘어놓자 동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에선 메이저리그를 일상적으로 접하는 팬들이 잠시 잊고 있던 빅리그의 위용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된다. 영화에 조연으로 참여한 마이너리그 선수는 "우리가 얼마나 버스를 오래 타는지, 그리고 경기에 지면 이길 때보다 얼마나 힘들고 재미없는지를 제대로 묘사했다."고 평가했다.

이 외에도 매일 경기 전 예배를 드리자고 제안하는 신실한 선수부터 타격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에 주술적인 행동을 하는 선수들의 일화 모두 실제 상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익히 알려졌다시피 론 셸턴 감독의 이색 경력 때문이다. 덩크슛 (White Men Can’t Jump), 틴 컵 (Tin Cup) 등 여러 스포츠 영화를 연출한 셸턴은 196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36라운드 전체 719번째로 볼티모어에 지명된 실제 선수 출신이다. 5년간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가 한계를 절감하고 대학으로 돌아온 셸턴은 학업을 마친 뒤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기존 스포츠 영화가 지나치게 팬들의 시각에서만 다뤄진다는 점에 아쉬움을 느끼고 '제대로 된 스포츠 영화'를 만들겠다며 이 작품을 연출했다. "한 달에 몇 백 달러로 연명하던 마이너리그 선수들에게 걱정은 딱 두 가지다.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 그리고 오늘 밤 여자를 찾을 수 있을지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말이다.

마이너리그 원정 경기의 라디오 중계를 재현한 장면도 흥미롭다. 전화로 타석의 결과를 전달받으면 캐스터가 나무 막대를 쳐 타격 소리를 낸 뒤 사전 녹음된 관중 함성 효과음을 틀어놓고 경기 상황을 설명하는 식이다. 실제로 1921년 처음 시작된 초창기 메이저리그 라디오 중계는 경기를 현장에서 직접 보고 전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마이너리그에서는 한참 뒤에도 이런 식으로 중계했다고 한다. 전신 시스템이 오작동할 경우 캐스터들은 경기장에 천재지변이 발생했다거나 선수들끼리 언쟁이 붙었다는 식의 갖가지 '하얀 거짓말'을 동원해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얼마나 창의력을 발휘해 살을 붙이는지가 캐스터의 능력으로 평가받던 시기였다. 그 중 1930년대 시카고 컵스 경기 중계를 맡아 탁월한 상상력을 덧붙이면서 이름을 떨친 캐스터는 이후 할리우드로 무대를 옮겨 배우가 됐고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바로 로널드 레이건이다.
구단 버스도 꽤 비중있게 다뤄진다

구단 버스도 꽤 비중있게 다뤄진다

연패에 빠진 선수들이 다음 날 경기가 벌어질 구장에 밤새 스프링클러를 틀어 경기를 취소시키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이것 역시 셸턴 감독의 선수 시절 일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셸턴 감독의 실제 현역 시절에는 해당 원정팀의 구단주가 헬기를 빌려 그라운드의 물기를 제거하면서 경기 자체는 그대로 열렸다고 한다. 로맨틱 코미디로 분류되는 만큼 조금 황당한 장면이나 우스꽝스러운 대사도 있지만 투수와 타자의 1대 1 대결을 근접 촬영으로 밀도 있게 구성하는 등 야구적인 면에서 몰입을 방해하는 실책은 거의 저지르지 않는다.

다만 야구 종주국이라 해도 당시 마이너리그를 다룬 영화가 흥행할 거라 기대한 사람이 없어 제작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고향을 배경으로 한 마이너리그 영화를 만드는 게 소원이던 제작자 톰 마운트와 마이너리그의 잠재력에 주목해 상품성을 끌어내려던 더램 불스의 마일즈 울프 구단주가 가세해 순조롭게 작품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배우들의 진정성있는 연기가 더해져 케빈 코스트너는 “마이너리그 야구장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빅리그 드라마를 담아냈다”고 자평했다.

영화는 개봉 뒤 5천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달성한 것은 물론, 평단의 찬사까지 받으며 각종 영화제의 각본상을 수상했다. 야구계에서도 '진짜 제대로 된 야구 영화'로 인정해, 개봉 15주년을 맞은 2003년에는 명예의 전당에서 기념행사까지 계획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팀 로빈스가 이라크전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부시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는 이유로 명예의 전당 측이 행사를 취소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수많은 야구 영화 가운데 가장 큰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셸턴 감독은 자신이 잠시 뛰었던 미네소타 산하 트리플 A팀인 로체스터 구단 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잘 알려진 대로 극중 주요 배역을 맡은 수잔 서랜든과 팀 로빈스는 이 영화를 계기로 사적인 인연을 형성하기도 했다. 울프 구단주의 바람대로 더램 불스 구단이 큰 관심을 모으면서 시즌 관중수도 크게 늘었다고 한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가 선정한 최고의 스포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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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턴 감독은 일반적인 팬들이 스포츠의 핵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물론 모르는 게 당연하고, 오히려 모르는 게 좋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야구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해고되지 않기 위해 항상 노력할 뿐 아니라 낭만적인 꿈도 간직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들이 실제 뛰고, 샤워하고, 버스타고 돌아다니는 느낌을 전하고 싶었단다. 그래서 이 영화는 스포츠의 주체인 선수들의 시각에서 그려진 새로운 스포츠 영화의 모델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를 본 뒤, 매일 승패와 기록으로 평가받는 메이저리그의 이면에 훨씬 더 많은 마이너리거들이 땀 흘리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최후의 수수께끼가 하나 남아 있다. 이 영화에 대해 관심이 있는 우리나라 팬 누구도 쉽게 풀지 못한 문제, 바로 제목이다. 영화의 원제는 '불 더램(Bull Durham)' 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마이너리그 팀, '더램 불스'의 이름과도 관계가 있고, 야구 역사에서 불펜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찾을 때 등장하는 담배 회사의 광고판 문구도 'Bull Durham'이어서 이래저래 메이저리그에서 유래가 깊은 단어의 중의적인 조합이다.
더램 불스의 상징, 대형 황소 간판

더램 불스의 상징, 대형 황소 간판

현실적으로 국내 개봉에 그대로 가져오기 어려운 제목이긴 하지만 그래도 '19번째 남자'는 꽤 뜬금없다. 영화를 잘못 본 게 아닌 이상 19번째 남자라는 표현이나, 이를 유추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없다. 굳이 엮자면, 매 시즌마다 새로운 유망주를 애인으로 삼는 수잔 서랜든의 기행이 19번째에 이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역시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몇 년 전, 영화 수입사인 이십세기 폭스 사무실과 영화 전문 주간지에 문의했으나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1년에 번역되는 영화의 수를 감안하면 1990년에 국내에 개봉해 흥행도 실패한 영화의 한글 제목을 지은 사람조차 누군지 알 수 없을 것 같다. 간혹 영화 매체에서 이런 소재를 기사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사연이 특이하거나 흥행에 성공한 영화 정도가 언급되는 게 당연하다. 어찌 보면 메이저리그에 대한 관심조차 드물던 시기에 마이너리그를 소재로 한 영화를 국내에 들여왔다는 건, 영화의 핵심이 야구보다 인간의 성장에 있다는 점을 간파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 출처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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