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 영화의 클래식, '꿈의 구장'
야구광 아버지를 둔 뉴욕 출신 남자가 있다. 아버지와 관계가 편치 않은 탓에 일부러 캘리포니아 지역의 대학에 입학해 거리를 뒀던 그는 가정을 꾸린 뒤 농장을 사들여 서른여섯 나이에 옥수수를 경작하는 농부가 된다. 해질녘 옥수수밭을 둘러보던 남자는 우연히 정체 모를 목소리를 듣게 되고, 그 계시에 이끌려 옥수수밭을 갈아엎은 뒤 야구장을 만든다. 그 곳에 아버지가 우상으로 삼았던 전설적인 야구 선수들이 등장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꿈을 찾아간다.

내년 선보일 현실판 '꿈의 구장'
얼핏 엉성한 판타지 영화의 줄거리처럼 보이지만, 야구를 소재로 한 대표 명작이자 미국 영화 100주년 기념 100대 작품에도 선정된 '꿈의 구장(Field of Dreams, 1989)'의 도입부다. 영화가 개봉 30주년을 맞은 올해, 롭 만프레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이른바 '꿈의 구장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옥수수밭에 만들어진 영화 속 야구장에서 내년 8월 13일, 뉴욕 양키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정규시즌 경기를 치르겠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황당한 시도같지만 영화 안팎의 얘기를 살펴보면 그리 엉뚱한 일만은 아니다.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한 옥수수밭 주인의 이름은 레이. 그가 이웃의 조롱을 무릅쓰고 밭을 없앤 다음 야구장을 만드는 일은 영화가 시작되고 10여분이 지나면서 이미 끝난다. 즉, 알 수 없는 계시에 따라 야구장을 지은 것은 전체 줄거리의 밑그림일 뿐이어서 이제 진짜 영화가 시작된다는 신호로 보면 된다.

야구팬들의 전설이 된 옥수수밭 야구장
영화를 이어가기 위해선 '블랙 삭스 스캔들'에 대한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블랙 삭스 스캔들은 구단주의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던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도박꾼들의 청탁을 받고 일부러 경기를 내준 실제 승부 조작 사건을 말한다. 파문이 커지면서 8명의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영구 제명됐는데, 이 중 ‘맨발의 조’로 불린 조 잭슨은 다른 선수와 달리 석연치 않게 퇴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월드시리즈에서 양 팀 최다인 12안타를 기록했고, 이 시리즈에서 나온 유일한 홈런의 주인공이었을 정도로 승부 조작에 가담했다고 보기에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잭슨은 자필 서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수준의 문맹이었다. 리그 전체에 찌든 허물을 감추려다 역대 통산 타율 3위(0.356)의 대타자 잭슨이 무리하게 제명됐다는 여론이 형성됐고, 테드 윌리엄스를 비롯해 야구계 유력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구명 운동을 벌였지만 끝내 복권은 이뤄지지 않았다. (‘꿈의 구장’이 공개되기 전에 블랙 삭스 스캔들을 다룬 영화, 'Eight Men Out' 도 개봉돼 현지 여론을 환기시킨 바 있다.)

조 잭슨에 대한 여론은 한결같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본다. 어느 날 밤, 레이가 만든 야구장에 예고없이 조 잭슨이 나타난다. 생전의 억울함을 알아줄 적임자라 생각한 듯 레이와 시선을 주고받은 잭슨은, 감격적으로 잔디를 밟고 타격을 해가며 한풀이를 한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만남은 그렇게 하룻밤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레이는 또 다른 목소리에 이끌려 전설적인 은둔 작가를 찾아 나서는가 하면 메이저리그에서 대수비로 한 경기만 뛰고 사라진 선수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한 때 빅리거를 꿈꿨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까지 우연히 만난다. 각자 야구와 관련된 사연을 가진, 그러면서 누군가에게는 향수의 대상인 20세기 초반 인물들은 그렇게 레이에 이끌려 옥수수밭 야구장에 모이게 된다. 시대를 초월해 나란히 환생한 그들이 서로 짓궂은 농담을 던져가며 경기를 펼치는 순간은 스포츠팬들이 상상만 했던 것을 멋지게 영화화한 가슴 벅찬 장면이다. (다만, 우투좌타인 조 잭슨이 좌투우타로 바뀌어 구현된 부분은 아쉽다. 필 알든 로빈슨 감독은 영화의 핵심과 무관한 장면이고, 잭슨 역을 맡은 리오타가 오른손잡이라는 점을 배려했다고 하지만 실제 선수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아쉽다는 의견이 많다.)

상상을 스크린에 극적으로 옮기다
야구에 대한 애정이 깔린 연출, 그리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도록 안내하는 담담한 전개 덕에 매력적인 장면이 여럿 만들어졌고 영화는 개봉 후에도 꽤 회자되며 수많은 사연들을 덧붙여냈다. 야구에 무관심한 사람이라 해서 영화의 설정에 큰 반감을 가질 것 같지는 않다. 퓨전 사극을 비롯해 시대를 바꿔가며 펼쳐지는 수많은 판타지 드라마에서 다른 시대, 다른 세계의 사람끼리 접촉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무작정 허무맹랑하지는 않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꿈의 구장' 역시 야구 지식과 무관하게 공감을 형성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야구 영화 전문 배우로 불리는 케빈 코스트너의 역할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가 캐스팅 작업에 돌입하던 시점에 이미 코스트너는 '19번째 남자 (Bull Durham)'라는 야구 소재의 영화로 주목받은 상황이었기에 제작진은 코스트너를 일부러라도 찾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데뷔작의 흥행에 실패한 신출내기 감독에게 스타 배우인 코스트너가 먼저 출연하겠다는 뜻을 전해왔고 그렇게 케빈 코스트너는 2년 연속 야구 영화에 등장해 연타석 홈런을 터뜨렸다. (훗날 '사랑을 위하여 (For Love of The Game, 1999)'까지 출연하면서 이른바 코스트너의 야구 영화 3종 세트가 완성된다.)

추억을 토대로 야구 이상의 의미를 짚는다
1905년 뉴욕 자이언츠 소속으로 단 한 경기에 나서 대수비로 1이닝만 뛴 실존 선수, 문라이트 그레이엄을 찾아가는 과정도 신비롭다. 영화의 원작 소설인 '맨발의 조(Shoeless Joe, 1982)'를 쓴 작가 킨셀라는 자료를 수집하다 우연히 야구 백과사전(Baseball Encyclopedia)에서 타석 없이 1이닝 수비만 기록된 특이한 선수를 발견하고 이 선수의 사연을 소설에 넣기로 마음먹었다. (베이스볼 레퍼런스같은 웹사이트가 없던 시절, 야구 백과사전이나 토탈 베이스볼(Total Baseball) 등의 두꺼운 간행물은 야구 애호가들이 역대 선수들의 공인된 기록을 찾는 중요한 통로였다. 2000년대 중반까지도 매년 발행됐다.) 킨셀라는 실제 그레이엄의 흔적을 찾기 위해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던 마을에 찾아간다. 그리고 주민들을 상대로 관련 정보를 취재하던 중 그레이엄이 은퇴 후 지역에서 의사로 봉사활동을 펼치는 데 여생을 쏟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 사연까지 소설에 녹여냈다. 영화에서 그대로 반영된 것은 물론이다.

관광지로 거듭난 영화 촬영지
영화는 메이저리그의 황금기와 레전드에 대한 향수를 다양한 방식으로 곱씹는다. 이 과정에서 야구에 대한 미국인의 애정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문화 전문가 빌 브라이슨은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메이저리그는 미국의 심리 세계를 지배하는 스포츠 이상의 존재였고, 월드시리즈는 1년에 한 번씩 온 국민이 스포츠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게 되는 시기였을 만큼 그 인기가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여전히 메이저리그의 입지가 꽤 굳건하던 시기에 개봉된 ‘꿈의 구장’은 그 자체로 흥행에 성공한 것은 물론, 영화 촬영지도 연간 10만 명이 찾는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세대 간의 추억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풀어간 영화가 현실에서 서로 추억을 공유하는 물리적인 매개까지 창출했다는 게 환상적이다. 영화는 제작 의도로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취를 남겼다.

2020년판 '꿈의 구장'
2019년에 '꿈의 구장 프로젝트'를 발표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메이저리그의 흥행 위기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도 그 해법을 '꿈의 구장'에서 찾는다는 건 메이저리그가 다른 스포츠보다 세대 간의 연결이라는 지점에서 한발 앞서 있다는 점을 짚어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 촬영지인 아이오와주의 다이어스빌에는 빅리그 경기가 열릴 꿈의 구장이 만들어지고 있다. 8천석 규모에 외야 한 쪽을 유리벽으로 만들어 옥수수밭이 보이도록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미국의 주요 프로 스포츠 가운데 유튜브 활용에 가장 뒤떨어진 종목답게 진부한 쇼만 남겨둔 채 우습게 끝날 수도 있다. 그래도 과감한 시도 자체는 충분히 부럽다. 추억을 잘 간직하는 법에 능통한 미국이, 그 추억의 가치를 재창출하려는 시도에는 박수를 보내게 된다. 2020년 8월에 케빈 코스트너가 아이오와의 옥수수밭 야구장에서 시구하는 장면은 꽤 멋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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