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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훈칠의 맥스MLB] '그래도, 다시 한 번' 재키 로빈슨

[전훈칠의 맥스MLB] '그래도, 다시 한 번' 재키 로빈슨
입력 2020-04-13 11:15 | 수정 2020-09-15 09:51
20세기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

20세기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4월 중순의 행사 분위기는 익숙하다. 이날이 다가오면 메이저리그 역사를 빛낸 야구 원로들이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현역 선수들은 그에 동참해 모두 42번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뛴다. 20세기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를 기리는 '재키 로빈슨 데이'다. 최근에는 선수마다 재키 로빈슨을 기념하는 개성있는 문양을 야구화에 새겨 넣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브라이스 하퍼의 로빈슨 데이 기념 장비

브라이스 하퍼의 로빈슨 데이 기념 장비

해마다 희망찬 개막 분위기 속에서 거행됐지만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풍경이 달라졌다. 야구장 문이 굳게 잠긴 가운데 로빈슨 데이를 맞는 상황. 굳이 의미를 두자면 더 차분하고 온전하게 재키 로빈슨 데이의 가치를 곱씹을 기회라 생각할 수도 있다. 시대와 환경이 달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 놓였을 때 되짚어 참고할 대목도 있다.

전쟁같은 이야기의 시작은 말 그대로 진짜 전쟁부터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야구를 지속해야 하는지 의문이 커져갔다. 랜디스 커미셔너가 직접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리그 강행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루스벨트는 국민들에게 국가 상황이 안전하다는 상징적인 신호를 보내는 동시에 심리적 해방구도 제공할 수 있다며 메이저리그를 평소처럼 치르라고 답장을 보냈다. 이것이 잘 알려진 '그린 라이트' 편지다. 야구 산업을 통해 일자리가 유지되는 측면도 고려했고 항간에는 야구를 취소할 경우 일본이 미국을 얕잡아볼 것이라는 이야기도 돌았다고 한다. 물론 갑작스러운 공습에 대비해 야간 경기는 금지했고, 적군에게 전달되는 정보를 최소화하기 위해 방송 중계에서 날씨 언급도 할 수 없도록 했다.
MVP 수상 이듬해 참전한 그린버그

MVP 수상 이듬해 참전한 그린버그

리그는 이어졌지만 분위기는 같을 수 없었다. 젊은 선수 상당수가 입대했다. 주전, 비주전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1940년 아메리칸리그 MVP 행크 그린버그도 마찬가지여서 1941년 시즌 개막 후 19경기를 치른 시점에 입대해 대전차 포병으로 근무했다. 그린버그는 그해 말, 명예 제대 대상자가 돼 군복을 벗었는데 이틀 만에 진주만 공습이 벌어져 다시 입대했고 결국 만 4년 가까이 복무했다. 1945년 시즌 도중 완전히 제대한 그린버그는 복귀전에서 기념비적인 홈런을 터뜨렸고 팀도 그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테드 윌리엄스, 조 디마지오, 밥 펠러 등 당대의 다른 스타들도 나라를 위해 전성기를 반납했다. 1941년 월드시리즈 1차전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린 뉴욕 양키스 선수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입대했을 정도였다.

당장 선수가 부족했다. 구단들은 급한 대로 은퇴 선수나 아직 입대 자격이 갖춰지지 않은 어린 선수를 데려왔다. 1944년 신시내티는 만 열 다섯의 조 넉스홀이라는 투수를 투입하기도 했다. (한 경기만 뛰고 돌아가 학업을 마친 넉스홀은 이후 마이너리그를 거쳐 신시내티 역대 왼손투수 최다 출전 기록을 가진 선수로 남았다.)

이런 선수 수급조차 경쟁이다 보니 상상을 초월하는 일도 벌어졌다. 1945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가 데려와 좌익수로 기용한 피트 그레이는 77경기를 뛰면서 2할 초반의 타율을 기록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신통치 않은 수치지만 그레이는 어릴 적 사고로 오른팔을 잃은 외팔이 선수였다. 통계 전문 사이트 베이스볼 레퍼런스는 피트 그레이의 투타 정보 옆에 굳이 한 가지를 더 표시해뒀다. '타격:좌타(Left). 투구:좌투(Left). 수비:역시 좌측(Left as well)'. 그레이가 왼손에 낀 글러브로 공을 포구한 뒤, 재빨리 글러브를 오른쪽 겨드랑이로 옮겨두고 왼손으로 송구하는 장면은 유튜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왼팔로만 타격하는 모습도 물론이다.
인간 승리의 사례로도 인용되는 피트 그레이

인간 승리의 사례로도 인용되는 피트 그레이

1944년까지 모두 500여명의 메이저리거가 입대했고 마이너리거는 훨씬 많아서 5,000명에 달했다. 그 중 듀크 스나이더와 랄프 카이너 등 훗날 대스타가 된 선수들도 있었다. 전쟁에서만큼은 인종을 따지지 않았다. 흑인끼리 결성한 니그로리그의 선수들도 나라의 부름에 응답했고 벅 오닐, 몬트 어빈 등 전설적인 선수들이 입대했다. 그들 사이에 바로 재키 로빈슨도 있었다.

이제 진짜 로빈슨 이야기다. 전쟁이 끝나자 리그는 활기를 되찾았다. 부상을 입고 돌아온 몸으로 고군분투하는 선수들에게는 홈·원정팀과 무관하게 응원이 쏟아졌다. 자연스럽게 군복무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흑인들에게도 사회 참여의 기회를 열어줘야 한다는 소수의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종 문제에 열려 있는 챈들러 커미셔너가 새로 부임해 전향적인 분위기가 형성됐고, 수익 구조에 대한 구단주들의 위기의식 속에 흑인 관중을 받아야 이윤을 높일 수 있다는 공감대도 퍼져 있었다.

절묘한 시기에 적절한 인물이 나섰다. 브루클린 다저스 단장으로 부임한 브랜치 리키는 새로운 시도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팜 시스템(Farm System)'이라 불리는 마이너리그 체계를 완성하고 플로리다 스프링캠프를 개척한 것으로 유명한 리키는 혁신이 곧 자신의 존재 이유나 다름없는 혁명가였다. (당시 스프링캠프에는 100미터 달리기와 맨손 체조같은 과정도 있었다.) 최초로 피칭 머신을 도입하고 타자들이 헬멧을 쓰도록 하는 등 리키 단장은 다채로운 발상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초기 다저스 캠프의 단체 체조

초기 다저스 캠프의 단체 체조

분야를 가리지 않는 호기심에다 사소한 변화를 놓치지 않는 집요함이 독보적이었다. 세인트루이스의 유니폼에 두 마리의 홍관조가 앉아있는 문양도 브랜치 리키의 작품이니 말 다했다. 야구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린 리키 단장이 재키 로빈슨을 발굴한 것은 그래서 놀랍지 않다. (다만 현역 시절엔 별 볼 일 없는 선수였는데, 한 경기에 무려 13개의 도루를 내준 불명예의 주인공이어서 간혹 틈새 퀴즈 소재로 언급되기도 한다.)

리키 단장은 재키 로빈슨 영입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옳은 일이라는 점. 리그 가치를 높이는 일이라는 점. 그리고 승리와 수익까지 가져올 수 있다는 점. "달러에는 흑백이 없다. 모든 달러는 녹색일 뿐"이라는 말을 남긴 사람이 리키 단장이다. 더 미룰 필요가 없었다. 치밀하게 로빈슨 영입 작업을 기획했다. 야구 실력보다는 가혹했던 사회적 분위기에 굴하지 않는 기질을 눈여겨봤다. 로빈슨은 군복무 시절 버스에서 흑인 전용석에 앉으라는 지시를 거부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고, 니그로리그에서 뛸 때는 흑인에게 화장실 개방을 거부한 주유소 직원을 굴복시킨 적도 있다. (팀 동료였던 벅 오닐은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입술을 떨어가며 '주유소 사건'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후 로빈슨과 함께라면 모든 주유소에서 화장실을 갈 수 있었다. 심지어 주유를 하지 않더라도!")
영화 '42'를 통해 재현된 '가상 인종 차별'

영화 '42'를 통해 재현된 '가상 인종 차별'

리키 단장이 재키 로빈슨을 처음 만난 날도 말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된다. 리키 단장은 로빈슨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설명하지 않았다. 면전에서 '가상 인종 차별'을 가하면서 현실적인 얘기를 꺼냈다. 상상할 수 있는 모욕적인 상황을 모두 연기해가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게 오히려 진정성을 전달한 것 같다. 참아내야 빅리그에서 뛸 수 있다고 했고, 로빈슨은 "당신이 내기를 걸었으니 나도 사고를 치지 않는다고 약속하겠다"고 답했다. 첫 만남에서의 '가상 인종 차별'과 주유소 화장실 일화 모두 영화 '42'에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영화 '42'는 치밀한 고증 작업과 탁월한 캐스팅으로 로빈슨의 생애를 실감나게 재현한 2013년 작품으로 유일한 아쉬움은 국내에 개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리키 단장이 업적 탓에 미화된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땀이 보약"이라며 선수들의 휴식을 금기시하고 사생활을 지나치게 통제했으며 간식으로 뭘 얼마나 먹는지까지 감시할 정도로 비인간적인 면도 있었다. (불시에 몸무게를 잰 뒤 간식량을 제한하는 방법으로 압박했다.) 계약을 협상하는 자리에 가짜 계약서를 펼쳐놓고 상대를 현혹시키기도 했다. 일부 시대 보정을 해도 흑역사 자체를 무시하긴 어렵다.
재키 로빈슨과 브랜치 리키

재키 로빈슨과 브랜치 리키

로빈슨은 계약 직후 다저스의 트리플A팀인 몬트리올 로열스에서 1년을 보냈는데 예상대로 험난했다. 타석에 들어서는 자신을 향해 검은 고양이를 던지며 "재키, 네 사촌이야!"라고 조롱하는 관중이 있는가 하면 조명탑 고장을 이유로 상대팀이 먼저 경기를 취소한 경우도 있었다. (낮경기였다고 한다.) 흑인이 출전한다는 이유로 경찰이 출동해 감독을 체포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로빈슨은 결국 경기에서 빠졌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식사를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야구장에서 실력과 정신력으로 버텨가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최소한 홈관중에게는 환호 받는 선수가 됐다.

메이저리그는 더 험난했다. 로빈슨을 다저스에 합류시키면서 리키 단장은 전체 선수단에게 "승리할 수 있다면 몸이 하얗건 까맣건 줄무늬가 있건 상관없다"고 했지만 구단 방침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동료 선수가 여럿 나타났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리키 단장이 보호막을 두텁게 쳤다. 올스타 출신에 타점왕 경력을 지닌 선수라 해도 끝내 트레이드로 내보냈다.
경기력으로 존재감을 입증한 로빈슨

경기력으로 존재감을 입증한 로빈슨

다만 다른 팀은 문제였다. 리키 단장이 남의 팀 선수까지 휘저을 수는 없었다. 로빈슨이 타석에 서면 빈볼이 다반사였고 1루 수비에선 주자들이 베이스 대신 로빈슨의 발을 향해 돌진하기도 했다. (당시 경기 영상에서 1루수 로빈슨이 포구 즉시 발을 빼는 장면을 찾을 수 있다.) 경기 중 로빈슨에게 목화밭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친 필라델피아의 채프먼 감독이 가장 악명 높았다. 원정 숙소에서 받아주지 않아 로빈슨 홀로 먹고 자는 것은 일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싸우는 방법이 야구에 몰두하는 것이라 여길 정도로 로빈슨은 확실히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조지 시슬러에게 밀어치는 법을 배운 1949시즌에 타격왕과 MVP를 차지했다. 로빈슨의 원정 경기마다 흑인 관중이 운집하자 반감을 드러내는 구단주도 줄었다. 신시내티 원정에서 동료 피 위 리즈가 인종 차별을 퍼붓는 관중을 향해 보란 듯 로빈슨과 어깨동무를 한 사건은 큰 화제가 됐고 그해 팀이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최소한 '야구 선수' 로빈슨은 대중적인 스타가 됐다. 다저스 신인 투수로 함께 했던 어스킨은 자신의 사인 세 개를 받아가는 어린이에게 이유를 물었는데, '어스킨 사인 여섯 개가 있어야 로빈슨 사인 한 개와 바꿀 수 있어서 사실 더 받으면 좋겠다'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로빈슨에게 배달된 살해 협박 편지

로빈슨에게 배달된 살해 협박 편지

데뷔 3년 만에 신인왕과 MVP를 모두 거머쥔 로빈슨이지만 야구장 밖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식수대에서 흑인과 백인이 다른 물을 마시는 건 여전했고 노골적인 살해 협박 편지를 받기도 했다. 악의적인 태도로 보도하는 언론도 꾸준했다. 셋째를 출산하고 넓은 집을 알아보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결론은 야구였다. 탁월한 스피드에 경기를 읽는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 그리고 저항 정신마저 느껴지는 공격적인 플레이까지. 로빈슨은 자신의 대표 종목도 아니었던 야구에서 1루, 2루, 3루, 외야수 등 팀이 필요로 하는 포지션을 두루 맡아가며 말없이 경기력으로 가치를 보여줬다. 월드시리즈에 다섯 번째 진출한 1955년에는 드디어 다저스를 정상에 올려놓아 상징성도 남겼다.

로빈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된 시간을 견뎌낸 덕에 흑인 선수들이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인권 단체에서 만족할 수준은 아니지만 서서히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현역 시절 로빈슨을 가장 집요하게 괴롭힌 팀, 필라델피아도 2016년 구단 명의로 공식 사과했다. 보스턴도 사과문을 낸 적이 있다. 다저스가 로빈슨을 영입하기에 앞서 시의회의 강한 권유에 마지못해 로빈슨의 입단 테스트를 치렀는데, 영입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은 일회성 이벤트였기에 로빈슨은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훗날 이 사건이 회자되면서 보스턴 구단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 보스턴은 메이저리그에서 흑인 선수를 받아들인 최후의 팀이기도 했다.
현대 메이저리그의 상징적 존재가 된 로빈슨

현대 메이저리그의 상징적 존재가 된 로빈슨

천하의 로빈슨이라도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기에 한계도 남는다. 로빈슨은 은퇴 후 내심 감독직을 기대했지만 끝내 자리를 얻지 못했다. 불과 6년 전, 시애틀을 지휘하던 맥클렌든 감독이 빅리그에서 흑인 지도자가 사라지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은 차라리 새삼스럽다. 여전히 흑인 선수의 비율은 낮고 진입 장벽은 높은 편이다. 그렇다고 로빈슨의 의미를 역사책 되짚기 정도로 축소시킬 수는 없다. 상징성만으로는 박찬호, 박지성 이상의 한국 선수가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선수가 혁명적인 행보를 보이더라도 로빈슨의 인생만큼 되짚을 가치는 없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흑인이 객체가 아닌 주체로 보이도록 한 최초의 인물로 로빈슨을 꼽았다. 어린이들이 흑인 영웅을 한 명이라도 떠올릴 수 있게 만든 사람이었다고도 했다. 로빈슨이 배트와 글러브 뿐 아니라 정신력으로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선수라고 한 스포츠 칼럼니스트 조지 벡시의 말도 널리 인용된다. 마틴 루터 킹이 로빈슨의 활약에 영감을 받아 목소리를 냈다고 말한 적도 있다. 매년 로빈슨을 조명하는 기사가 쏟아지지만, 노예의 손자였다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영웅의 이야기는 다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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