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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훈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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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훈칠의 맥스MLB] 예측 불가능한 인생 그 자체, '너클볼!'
[전훈칠의 맥스MLB] 예측 불가능한 인생 그 자체, '너클볼!'
입력
2020-07-2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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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0-09-15 09:50

가장 마구같은 공, 너클볼.
그런데 너클볼은 다르다. 너클볼이라는 구종 자체가 갖는 특별함은 물론 너클볼 투수가 굳이 그 공을 던지게 된 이야기까지, 곱씹을수록 인생의 희로애락이 제대로 응축된 것처럼 느껴진다. 조금 과장한다 해도 그럴 만하다고 납득하게 된다.

'너클볼의 대부' 필 니크로
회전없는 공은 날아가는 동안 이리저리 흔들린다. 솔기가 있는 쪽과 없는 쪽의 기류가 달라지면서 사소한 공기의 움직임에도 쉽게 휘둘린다. 날아가는 모양도 제각각이다. "춤추고, 솟아오르고, 때론 날갯짓에, 비틀거리다 떨어진다. 회전 없이,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모두 폴 딕슨 야구 사전에서 너클볼의 움직임을 묘사한 수식어들이다. 너클볼을 시각적으로 보기 쉽게 구현한 것이 축구에 존재한다. 호날두와 주닝요의 전매특허로 유명한 무회전 프리킥이 정확히 같은 원리로 비행한다. (무회전 프리킥을 너클 프리킥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물리학 이론의 사례로도 이용된다
그래서 너클볼 투수에게 전담 포수는 필수다. 가장 최근에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너클볼 투수 R.A. 디키에게는 전담 포수 조시 톨리가 있었다. 디키가 2012년 말 토론토로 트레이드되는 과정에서 톨리도 패키지처럼 함께 이적한 건 너무 자연스러웠다. 2011년까지 보스턴에서 뛰고 은퇴한 팀 웨이크필드도 덕 미라벨리와 호흡을 자주 맞췄다. 미라벨리 역시 트레이드와 관련된 사연이 있는데 극적인 면으로는 톨리보다 훨씬 강렬하다.

웨이크필드의 전담 포수 미라벨리
그런데 시즌에 돌입하자 문제가 생겼다. 새로 임무를 맡은 바드가 별 일 아닐 것 같던 ‘너클볼 받는 행위’를 해내지 못했다. 너클볼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만 보면 사회인야구 선수로 보일 정도였다. 웨이크필드가 개막 후 던진 5경기에서 패스트볼(포일)만 10개. 바드가 별도로 개인 연습을 하는 장면이 중계방송에 잡히기도 했지만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엡스타인 보스턴 단장이 결단에 나섰다. 당장 5월 1일 뉴욕 양키스와의 홈경기부터 웨이크필드의 공을 바드가 받지 않도록 해야 했다. ESPN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는 전통의 라이벌전이라는 것만으로도 결단의 명분은 충분했다. 하지만 무시 못 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이 경기는 ‘밤비노의 저주’를 깬 주역이자 ‘동굴맨’으로 불리던 조니 데이먼이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뒤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로 처음 펜웨이 파크에 서는 무대였다. 풍성한 이야깃거리 덕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건 당연했다.

경기 직전 도착한 미라벨리
해당 자가용 비행기 업체 직원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미라벨리 이송 대작전'을 떠들어 댄 덕분에 펜웨이 파크 주변은 이미 미라벨리 환영 인파로 북적였다. 미라벨리는 호위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팬들의 박수를 받으며 경기장에 뛰어들었다. 마땅한 스파이크가 없어 윌리 모 페냐의 것을 대충 신었고 웨이크필드와 간단히 호흡만 맞춘 채 경기에 투입됐다. 웨이크필드는 7이닝 3실점으로 준수한 투구를 했고 미라벨리도 도루 저지 하나를 기록했다. 경기는 보스턴의 7대 3 승리.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백업 포수 트레이드는 이렇게 완성됐다. 너클볼이 만든 사건이었다.

미라벨리의 귀환을 환영하는 팬들
타자가 치기 힘들고 포수가 잡기도 힘든 너클볼.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잘 던지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다. 일단 일반적인 투수는 너클볼을 주무기로 삼을 이유가 없다. 굳이 비틀거리는 공을 던져 불확실성을 높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다수 너클볼 투수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너클볼을 던진 게 아니다.

타자에서 투수로 변신한 웨이크필드
이 방면 최고의 드라마는 R.A. 디키 몫이다. 테네시 대학 시절 95마일의 빠른 공을 뿌리던 디키는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에 뽑힐 정도로 인정받는 유망주였다. 1996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텍사스에 지명됐고 82만 5천 달러의 계약금을 약속받으며 순조로운 야구 인생이 진행되는 듯 했다.

디키의 삶을 바꾼 한 장의 사진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텍사스 구단 측은 당초 제시금액의 10분의 1도 안 되는 7만 5천 달러에 합의한 뒤 일단 마이너리그를 버티던지, 아니면 이대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디키에게 다른 선택지가 하나 더 있긴 했다. 학창 시절 ‘팔 보험’에 가입해뒀는데, 혹시 팔에 큰 문제가 생겨 선수 생명이 중단되면 100만 달러의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100만 달러를 받고 야구 인생을 접든지, 아니면 7만 5천 달러를 받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 선택은 마이너리그였고 메이저리그 데뷔까지 4년이 걸렸다.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선발과 불펜을 오갔는데 거의 기억에 남지 않는 선수였다. 2006년까지 텍사스에서 뛴 6년간 베이스볼 레퍼런스 기준으로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WAR)가 0.1이었다. 말 그대로 대체 선수였다.
허샤이저 투수 코치와 상의 끝에 너클볼 투수로 변신을 한 것도 이 때다. 2005년 말부터 진지하게 시도해 2006년에 전문 너클볼 투수로 정식 선발 기회를 얻었는데 4회를 채우지 못하고 홈런 6개를 얻어맞았다. (한 경기 피홈런 6개는 메이저리그 최다 타이 기록으로, 디키에 앞서 웨이크필드도 6개를 내준 적이 있다.) 완성되지 않은 너클볼의 위력(?)만 체험했다.

너클볼 투수 최초의 사이영상 수상자
'가치있는 것은 쉽게 가질 수 없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야구 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인내심을 꼽은 디키. 자신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점도 그동안 버텨 온 인생 여정이라고 말할 정도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르다. 너클볼 투수에게는 재능보다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디키가 자랑스러워하는 또 하나는 데릭 지터와의 상대 전적이다. (지터와 통산 전적 20타수 4안타. 반면 오마 인판테에게는 36타수 17안타로 매우 약했다.)
제대로 던져 본 사람이 별로 없으니 너클볼 투수들은 적절한 지도를 받기도 어렵다. 그래서 선후배 너클볼 투수들이 모인 커뮤니티가 발달했고 서로 노하우를 전수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그들의 문화도 생겼다. 기본적인 투구 정보는 물론이고 너클볼 투수에 대한 편견이나 그로 인해 빚어지는 다양한 사례를 공유하며 서로 ‘멘탈 관리’를 돕는 게 색다르다. 자신도 도움을 받았으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너클볼이 하나의 인생이 된다
* 유튜브 엠빅뉴스 계정을 통해 내일 (23일) 너클볼에 관한 영상이 함께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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