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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훈칠의 맥스MLB] 상상할 수 있는 '야구적 호기심'의 한계, 애스트로돔
[전훈칠의 맥스MLB] 상상할 수 있는 '야구적 호기심'의 한계, 애스트로돔
입력
2020-09-1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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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0-11-09 14:04
1950년대의 미국만큼 생동감 넘치고 즐거운 시간과 공간이 있었을까? 어떤 나라도 그런 번영을 누린 적은 없었다. 1951년 즈음에는 약 90퍼센트의 미국 가정에 냉장고가 있었다. 미국인이 세계 가전제품의 80퍼센트를 독차지하고 세계 인구의 5퍼센트에 불과한 미국인의 재산이 나머지 95퍼센트 인구가 지닌 재산보다 많았다. 미래에 대한 기대도 대단했다. 잡지마다 거대한 유리를 씌운 식민지가 세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야구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의 심리 세계를 지배했다. 물론 프로 풋볼과 프로 농구가 있었지만, 야구 시즌이 다시 시작될 때까지 추운 겨울을 지내는 데 약간의 도움을 주는 사소한 볼거리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산책' 中
정치와 이념을 잠시 접고 본다면 1950년대는 미국인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이 살아 숨쉬는 시대였다. 동시에 야구의 위상 역시 지금과 차원이 달랐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거대한 유리를 씌운 식민지 얘기라니. 누군가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상상이 현실로 이뤄지던 당시 미국에 정말 ‘거대한 유리를 씌운’ 야구 서식지가 탄생한 얘기다.
작가 빌 브라이슨이 찬양했던 바로 그 1950년대, 이야기는 휴스턴에서 시작된다. 당시 휴스턴 시장이던 호프하인즈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주 한 번 정도 막내딸 ‘디니’와 야구장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휴스턴에는 아직 메이저리그 팀이 없던 때라 트리플A 팀 버팔로스의 경기를 지켜보며 추억을 쌓았다. 다만 홈구장 버팔로 스타디움에서 각별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더위, 습도, 그리고 모기의 3중고 때문이었다. 여기에 비까지 내리는 날에는 모처럼 마련한 자리가 허탈하게 끝나곤 했다. 아빠와의 시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싶던 디니는 별 생각없이 한 마디 던졌다. “아빠, 야구는 실내에서 못해요?” 공신력 있는 기관이 인증해준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디니의 이 질문이 애스트로돔 역사의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이의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호프하인즈 시장의 추진력에 불을 붙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후 로마를 방문해 콜로세움을 보면서 돔구장 구상은 더 구체화됐다. 콜로세움에서 강한 햇살을 막기 위해 대형 천막을 씌웠다는 사실을 알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한때 돔 형태의 실내 쇼핑몰 건립도 추진해봤던 호프하인즈는 비용만 확보되면 이론적으로 어떤 크기의 돔 구조물도 지을 수 있다는 답을 얻은 상태였다. 쇼핑몰은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 의욕을 돔구장 건설 쪽으로 옮겨 부었다.
야구계에서 돔구장 구상이 처음은 아니었다. 월터 오말리가 브루클린 다저스의 새 구장을 고려하면서 학계의 도움을 받아 돔구장 건축을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많았고 오말리는 훗날 장소를 옮겨 캘리포니아 야구의 상징을 짓는 쪽으로 계획을 바꿨다. 그 결과물이 다저 스타디움이다.
때마침 메이저리그도 몸집을 불리는 시기였다. 1960년 내셔널리그 구단 증설이 결정됐고 휴스턴에도 메이저리그 팀이 들어섰다. ‘휴스턴 콜트45’라는 이름이 붙은 빅리그 팀은 1962년 창단 첫 시즌을 치렀는데 홈구장 콜트 스타디움은 앞서 말한 ‘3중고’를 체험해야 하는 면에서 버팔로 스타디움과 달라진 게 없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경험해야 했다. 리그 사무국은 열사병을 우려해 콜트 스타디움의 야간 경기를 확대 편성하도록 허가해줬다. 선수들에게는 더위보다 모기가 더 큰 문제였다. 특히 수비를 위해 자세를 잡고 집중해야 할 때가 고역이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휴스턴 경기에서 모기 기피제를 바르는 요령이 팀마다 전파될 정도였다. “휴스턴 모기들은 터보 엔진을 장착한 것 같다”던 샌디 쿠팩스의 말도 전해진다.
모기의 추억 때문인지 몰라도 호프하인즈 시장은 휴스턴에 유치되는 메이저리그 구단이 반드시 돔구장을 쓰도록 하겠다고 생각해왔다. 1962년 야심차게 첫 삽을 떴는데, ‘콜트45’라는 팀명에 걸맞게 삽질 대신 권총을 발사하는 행사를 진행해 착공식부터 틀을 깼다. 그리고 선수들이 모기약을 발라가며 3년의 고통을 견딘 끝에 1965년 최초의 다목적 돔 건축물이 개장했다.
원래 이름은 지명을 딴 해리스 카운티 돔이었지만 호프하인즈 시장은 우주 산업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휴스턴의 이미지에 맞춰 구단명도 바꾸기로 했다. ‘콜트45’를 대신할 최종 후보, 애스트로스(Astros)와 스타스(Stars) 가운데 협력사 대표의 의견을 반영해 휴스턴 ‘애스트로스’ 구단의 홈구장, ‘애스트로돔’으로 정리했다. (막내딸 디니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명칭 변경 역시 자녀들의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20년 현재에도 돔구장을 처음 보면 신기한 생각이 든다. 하물며 1965년 기준이라면 무엇이든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수천대의 자동차가 늘어선 주차장 중심부에 우뚝 솟은 돔구장은 실내 온도가 사시사철 22도로 유지됐다. 호화로운 스카이박스와 다양한 레스토랑은 물론 미용실과 볼링장, 예배당에 날씨 안내소도 마련됐다. 야구에 무심한 관중에게는 각종 엔터테인먼트 시설에 눈길이 가도록 만들었다. 코미디언 밥 호프 씨는 “이제 분만실과 묘지만 갖추면 평생 나갈 일 없는 곳”이라고 했다. 조금 낯간지럽지만 미국인들은 애스트로돔을 ‘세계 8대 불가사의’라 불렀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말했고 여기에 호프하인즈 시장이 ‘8대 불가사의’로 살을 붙였다고 한다.)
애스트로돔 개장 경기는 전국적인 화제였다. 애스트로스로 이름을 바꾼 만큼 구장 관리인들이 우주복을 본뜬 옷을 단체로 입고 경기 준비 작업에 임했는데, 이조차 사건일 정도였다. 특히 210만 달러를 들여 만든 초대형 전광판, ‘애스트로라이트’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돔구장 방문으로 이미 들뜬 관중들은 외야 벽면을 따라 좌우폭 144m에 걸쳐 조성된 전광판을 보고 한 번 더 입이 벌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SK행복드림구장의 빅보드를 일상적으로 접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봐도 간단치 않아 보일 정도다. 경기 상황에 맞춰 관중을 유도하는 전광판 그래픽은 애스트로돔이 시초이자 표준이 됐다. 우리에게 갤러그의 원조로 알려진 전설적인 슈팅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70년대 중반에 개발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전광판에 구현된 그래픽이 더욱 놀랍다. (유튜브에서 애스트로돔의 초창기 전광판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최초의 돔구장은 그 자체로 혁명이었지만 햇빛이 들어오고 천연 잔디를 깔아야 한다는 생각까지 버리지는 못했다. 일반적인 야구장에 지붕만 덮은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라운드와 잔디는 기존 방식 그대로였다. 천장 골조 사이사이로 4천 5백 개의 채광창을 구성해 잔디가 햇빛을 보고 자라도록 했다. 그런데 이것이 경기력을 좌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뜬공만 나오면 채광창 사이로 공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통에 야수들이 타구 판단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휴스턴 투수 켄 존슨은 “여기에서 뜬공을 정확하게 잡은 선수에게 훈장과 상금 50달러를 줘야 한다”고 했다.
결국 정상적인 경기 진행을 위해 천장의 채광창에 페인트를 덧칠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천연 잔디는 못 쓰게 됐다. 개장 한 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모양새가 빠지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1965년 시즌의 상당 기간 동안 죽은 잔디를 녹색으로 칠한 그라운드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말은 식상하지만 그래도 될 일은 되는 모양이다. 대안이 생겼다. 호프하인즈는 당시 막 특허 받은 인조 잔디를 학교에 설치했다는 몬산토 사를 찾아 접촉했다. 몬산토 사가 인조 잔디를 개발한 배경도 특이하다. 한국 전쟁 때 징집된 병사들 중 도시 출신이 지방 출신 인력에 비해 허약하다는 평가가 나왔는데, 근본적인 이유가 도시의 녹지 부족으로 결론나면서 포드 재단의 지원을 받아 도심 녹지 조성용 합성 잔디를 만들게 된 것이었다.
개발 배경이 뭐든 상관있으랴. 휴스턴 구단은 그 인조 잔디를 구해 1966년 개막에 맞춰 애스트로돔 그라운드에 까는 데 성공했다. 개발 초기여서 공급량이 시원치 않은 탓에 우선 내야 쪽만 덮은 채로 시작했지만 그 정도로도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애스트로돔의 혁신적인 이미지가 극대화됐고, 몬산토 사는 인조 잔디의 상품명을 아예 ‘애스트로 터프(AstroTurf)’로 바꿔 성공을 이어갔다. 1979년까지 26개의 메이저리그 구장 가운데 열 곳에 인조잔디가 조성됐다. 지금은 주류에서 완전히 밀려났지만 인조 잔디는 등장 이후 최소 30년, 길게는 50년간 미국 프로 스포츠의 패러다임을 뒤흔든 중요한 발명품이었다.
상식을 초월한 구장에서 상상하지 못한 일은 또 벌어졌다. 듣도 보도 못한 ‘페어 구역 중계’가 그 중 하나다. 1965년 4월 28일, 휴스턴과 함께 창단된 뉴욕 메츠와의 맞대결. 애스트로돔을 신기하게 둘러보던 메츠 중계진은 천장 꼭대기에 매달린 곤돌라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구장 관리인에게 문의해 몇 명 정도는 탈 수 있고 기술적으로 천장까지 올라가 방송도 가능하다는 답을 받았다. 창의적인 공간에서 창의성이 발휘된다고 하면 지나친 포장일까? 캐스터 린지 넬슨과 방송 관계자가 합심해 곤돌라에 매달려 중계방송을 해보기로 했다. 경기 전 이 소식을 접한 뉴욕 메츠의 케이시 스텡겔 감독은 혹시 타구가 곤돌라의 넬슨에 맞으면 어떻게 처리되는지 주심에게 물었고 당시 그라운드룰에 따라 그냥 인플레이가 될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드디어 천장의 곤돌라가 수직으로 지상에 내려왔다. 꼭대기부터 2루 베이스 근처에 도달하는데 45분, 다시 63미터를 올라간 곤돌라에 넬슨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버틴 채 섰다. 처음 몇 분간 넬슨은 그냥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고 한다. 공포심을 다스리던 와중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넬슨은 무전기를 통해 해설진과 얘기를 주고받으려 했는데 해당 무전기의 주파수가 휴스턴 택시업체의 무전 주파수와 겹쳐 혼선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넬슨의 무전기에서는 실시간 방송되는 경기 해설과 휴스턴 시내에서 택시를 호출하는 음성이 뒤죽박죽 흘러나왔다.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니 그라운드의 선수는 모두 같은 크기의 개미처럼 보였고 타구도 수평 궤적밖에 볼 수 없어 뜬공과 직선타구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곤돌라에 적응되면서 한 마디씩 끼어 들 형편이 됐는데 이미 7회가 진행중이었다. 유의미한 내용을 전달한 것은 휴스턴의 8회말 2득점 상황 정도가 전부였다. 마치 우주같은 곳에서 경기를 지켜본 넬슨은 특이한 일화만 남긴 채 지구상에 돌아왔다. 시카고 컵스의 대표 해설자였던 해리 캐리가 관중석에서 방송한 기록은 있지만 페어 구역에서 중계에 참여한 것을 넘어 스스로 그라운드 룰의 일부가 된 인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희소성에서 ‘페어 구역 중계’에 필적할 만한 사건이 하나 더 있다. 1976년 6월 15일에 발생한 ‘돔구장 우천 취소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돔에서 우천 취소라니. 일단 비 때문인 것은 맞다. 경기 개시 시간 저녁 7시 35분을 앞두고 낮 12시쯤 시작된 폭우는 그칠 줄을 몰랐다. 당일 시내 강수량이 190mm, 국지적으로는 332mm까지 기록된 곳이 있을 정도였다. 휴스턴 구단 공식 역사를 담당하고 있는 아코스타에 따르면 이날 거센 빗줄기에 구단으로 진입하는 모든 도로가 유실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휴스턴 도시 전체가 평탄하고 낮은 지대에 위치한 데다 애스트로돔의 그라운드가 지하 14미터 깊이로 지어진 구조적인 면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휴스턴 선수들은 3시 팀 훈련에 앞서 이미 1시쯤 대부분 도착한 상태였다. 그때만 해도 도로가 완전 침수된 건 아니었다. 버스로 단체 이동한 피츠버그 선수들 역시 도로가 봉쇄되기 이전에 경기장에 도착했다. 다만 숙소에서 구장까지 평소 15분이면 충분했는데 이날은 30분 넘게 걸렸다고 했다. 경기장 안에 머물던 선수들은 바깥 상황의 심각성을 모른 채 일상적인 훈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외야 전광판 쪽에서 빗물이 침투하긴 했지만 경기를 못할 거라 생각한 선수들은 거의 없었다. 폭우가 심해지기 전에 운좋게 도착한 열성팬도 20명 정도 있었다.
그러나 경기를 치르는데 꼭 필요한 심판진과 상당수 구장 관리 직원들은 빗줄기를 뚫지 못했다. 일부면 모를까 경기를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원이 대부분 없는 상태라 허술하게라도 경기를 치르는 게 불가능했다. 경기 시간이 다가오면서 당시 휴스턴 단장이던 탤 스미스에게도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다. 명분은 확실했다. 팬과 구성원들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오후 5시쯤 경기 취소 결정을 내렸다. 우천 취소는 보통 ‘레인 아웃(rain-out)’이라고 표현하는데 구단 대변인은 “정확히 얘기하자면 ‘rain-out’이 아니라 ‘rain-in’ 사태”라며 그 와중에 너스레를 떨었다. 사상 초유의 돔구장 우천 취소 사건은 이랬다.
덧붙일 만한 일화가 있다. 경기는 취소됐지만 선수들은 곧바로 귀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무엇보다 돔 밖의 세상이 어떤 상황이든 남은 사람들은 배를 채워야 했다. 구장 여기저기에 위치한 탁자들을 2루 베이스 근처에 모아 깔고, 준비할 수 있는 만큼 음식을 올리기 시작했다. 양팀 선수단의 보기 드문 그라운드 만찬이 벌어졌고 이미 경기가 취소됐기에 선수들은 부담없이 식사를 즐겼다. 당초 스위트석을 위해 준비해 둔 스테이크 메뉴가 제공된 가운데 음식보다 주류가 더 많이 소진됐다는 후문이다. 일찌감치 출근에 성공한 일부 구단 직원들은 물론 앞서 말한 열성팬 20여 명도 만찬에 동참해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했다.
식사를 마친 뒤 래리 디커를 포함한 선수 몇 명은 돔 천장까지 이어진 작업용 통로에 올라가 여유도 누렸다. 피츠버그 선수들은 버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8시가 지나서야 원정 숙소로 향할 수 있었다. 자가용을 이용해야 하는 휴스턴 선수들은 사정이 좀 달라서 일부는 그나마 수위가 낮아진 밤늦게 물길을 거슬러 퇴근했고, 몇몇은 아예 애스트로돔의 고급 스위트룸에서 잠을 청한 뒤 다음날 돌아갔다.
수많은 이야깃거리 못지 않게 애스트로돔에는 온갖 행사가 줄을 이으면서 다목적 건축물에 걸맞게 활용됐다. 야구, 미식축구, 복싱, 농구, 테니스 등 스포츠 경기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시사회와 전시회, 종교 행사는 물론 가축 품평회, 로데오, 콘서트, 정치 집회 등 사람들이 모일 만한 일로는 안 열린 것이 없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태풍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친 2005년에는 이재민들의 피신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애스트로스 구단이 개폐식 돔구장 엔런 필드로 홈구장을 옮긴 2000년 이후 기존 애스트로돔은 더 이상 예전의 명소가 아니었다. 추억의 가치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애스트로돔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다른 용도로 활용하려 애를 쓰기도 했다. 초대형 실내 공원을 꾸미려는 계획도 있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양조장’이라는 수제맥주 가게가 근처에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유지비 문제로 철거될 뻔 한 적도 있고, 오히려 철거 비용 때문에 결정이 미뤄져 존치된 기간도 있었다. 결국 돔구장 재생 프로젝트가 채택돼 NRG 스타디움으로 이름을 바꾼 채 훗날을 도모하고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임시 의료 시설로 사용되기도 했다.
애스트로돔 이야기가 재키 로빈슨의 인생처럼 역사에 화두를 던지는 소재는 아니다. 특정 인물이 모든 걸 일궈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옳지 않고, 더 들여다 보면 생각하지 못한 이면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파격적인 상상력과 과감한 추진력에 때론 유연함이 느껴지는 발상의 전환까지 폭넓게 아우르는 이야기라고 의미는 부여할 수 있다. 에버츠 필드나 크로슬리 필드처럼 미국인들만의 추억 속에 있는 야구장 이야기와 달리 애스트로돔은 확실히 피부에 더 와 닿는다. 그 역사를 돌이켜보면 누군가의 행동 의지를 조금은 자극할 만한 구석이 있다. 야구에 대한 진정성있는 호기심이 어떤 일까지 가능하게 할까. 또 다른 이야기를 기대하는 마음 한편으로 휴스턴이라는 지명이 현재 야구계에서 비아냥의 대상이 됐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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