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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훈칠
[전훈칠의 맥스MLB] 평균을 거부하는 '가을 DNA'의 마력
[전훈칠의 맥스MLB] 평균을 거부하는 '가을 DNA'의 마력
입력
2020-11-0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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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0-11-09 15:12
야구를 ‘확률의 스포츠’ 라고 한다.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는 상황이 숱하게 벌어지고, 그 때마다 확률을 높이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인다. 작게는 투구 하나 예측부터 크게는 선수나 팀의 미래를 전망하는 것까지 그렇다. 그래서 야구는 평균과의 싸움도 된다. 수많은 경우의 수에서 평균보다 한 발이라도 앞서야 최종 목표인 승리에 가까워진다.
상식적인 이야기다. 물론 충분한 표본이 전제돼야 한다. 몇 경기만 보고 평균치를 따져 전략을 세울 수는 없다. 팬들 사이에서 종종 언급되는 ‘야잘잘’이라는 말도 그렇다. ‘야구는 원래 잘하는 선수가 잘한다’는 뜻인데, 이 역시 충분한 표본이 있다는 전제 하에 통용되는 말이다.
가을 야구도 원칙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간판 선수가 활약하는 ‘야잘잘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확률과 평균을 거스르는 인물과 사건들이 생긴다. 경기수가 많지 않아 그렇다. 다만 가을야구에서는 누구도 적은 표본을 따져 묻지 않는다. 오히려 ‘가을에만 미치는’ DNA가 존재한다고 믿기도 한다. KBO리그 포스트시즌 미디어데이에서 ‘이번 시리즈에 미친 활약을 펼칠 선수’를 묻는 단골 질문만 봐도 그렇다. (요즘은 식상한 질문으로 평가받는다.)
올해 그 DNA의 주인공은 단연 탬파베이의 랜디 아로사레나였다. 작년에 데뷔해 아직 신인 자격을 유지하고 있는 선수지만 인지도만으로는 올스타급이 됐다. 뉴욕 양키스와의 디비전시리즈에서 게릿 콜, 다나카 등을 두들기며 세 경기 연속 홈런을 뿜었다. 낙관할 수 없던 시리즈 분위기를 휘어잡은 홈런이었다. 챔피언십시리즈, 월드시리즈에도 기세를 이어 단일 포스트시즌 최다 홈런 기록까지 세웠다. 말 그대로 걸리면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쿠바 출신의 아로사레나가 이 정도 돌풍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다. 짐작할 만한 표본 자체가 없었다. 세인트루이스 소속이던 2018년 트리플A에서 더블A로 강등되는 시련을 겪은 뒤 다시 트리플A에 복귀해 구단 마이너리그 월간 최고 타자로 선정되며 빅리그 승격까지 이룬 게 작년이었다. 잠재력은 있었지만 세인트루이스의 풍족한 외야진에 아로사레나가 주전으로 뛸 자리는 없었다.
이전까지 사소하게나마 아로사레나가 알려진 에피소드마저 실력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작년 8월, 호세 마르티네스가 부상자 명단에 오르면서 메이저리그에 승격된 때의 일이 첫 번째다. 아로사레나는 호텔에서 잠을 자다 트리플A 팀 감독으로부터 메이저리그에 급히 합류하라는 전화를 받았는데, 말 그대로 비몽사몽간이어서 꿈을 꾼 줄 알고 다시 감독에게 확인 전화까지 거친 뒤 현실을 인지했다는 지극히 소소한 사연이었다.
두 번째 사연 역시 경기 외적인 내용이다. 작년 디비전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가 애틀랜타를 꺾은 직후 마이크 실트 감독이 클럽하우스에서 선수들을 화끈하게 다독이며 거친 욕설을 내뱉었는데, 아로사레나가 이 장면을 SNS에 실시간 중계한 것이 문제가 됐다. 결국 욕설 장면이 공개된 실트 감독은 기자회견을 통해 사과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아로사레나가 원래는 괜찮은 친구라며 감싸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2020 시즌을 앞둔 지난 1월, 트레이드를 거쳐 탬파베이에 넘어 왔다. ‘비몽사몽 사건’의 발단이었던 호세 마르티네스와 함께였다. 이적 후 아로사레나를 성장할 재목으로 기대하는 전문가들도 있었지만 지금 수준은 아니었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는 바람에 9월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기회를 잡은 아로사레나는 왼손 투수 전문 요원으로 출전하다가 성과가 이어지면서 중심 타자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가을 괴물이 됐다. 불과 시즌 막바지 한 달 정도 뛰면서부터 벌어진 일이다.
아로사레나가 홈런을 날릴 때마다 세인트루이스 모젤리악 사장이 연관 검색어로 엮여 비판받곤 했다. 선수 잘 키우기로 유명한 세인트루이스가 알짜 타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남 좋은 일만 했다는 얘기인데, 뉴욕 양키스의 루크 보잇, 샌디에이고의 토미 팸 등 세인트루이스에서 나가 다른 팀 소속으로 포스트시즌 활약을 이어가는 선수들이 나올 때도 함께 원성을 샀다. (아로사레나와 보잇은 세인트루이스의 트리플A 팀 멤피스 구단 사상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3명 중 2명이기도 하다.) 모젤리악 사장은 월드시리즈 종료 후 기자회견에서 이례적으로 자신의 실책을 먼저 인정했다.
멕시코 리그에서 뛸 때는 물론 세인트루이스 데뷔 당시에도 아로사레나는 등번호 66번을 달았는데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야생마’ 푸이그를 보며 동질감을 느껴 선택한 번호였다. 강한 어깨와 역동적인 플레이 스타일이 스스로 비슷하다 여겼다고 한다. 쿠바 선수들 사이의 소문난 유대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쿠바 출신이면서 빅리그 경력이 많지 않은 유망주가 포스트시즌에서 미친 활약을 펼친 사례. 곧바로 1997년 플로리다 말린스의 리반 에르난데스가 떠오른다. 90년대부터 본격화된 쿠바 선수들의 탈출과 망명 가운데 초기 사례로 가장 유명한 선수가 바로 에르난데스다.
1997년은 플로리다 말린스가 창단 5년 만에 와일드카드 자격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해다. 플로리다는 디비전 시리즈에서 배리 본즈가 40홈런 치던 평범한 시절의 샌프란시스코에 3연승을 거뒀다. 챔피언십 시리즈 상대는 당대 최강팀 애틀랜타. 2승 2패로 맞선 5차전을 앞두고 선발 알렉스 페르난데스가 부상으로 이탈한 가운데 플로리다의 릴랜드 감독은 에이스 케빈 브라운마저 바이러스 감염으로 신통치 않다며 2년차 신인 리반 에르난데스에게 선발 중책을 맡겼다. 천하의 매덕스와 맞대결이었다. 그 매덕스가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결과는 에르난데스의 승리였다. 무려 15K 1실점 완투승을 거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에르난데스는 통산 17년간 두 자릿수 삼진을 기록한 게 네 번뿐일 정도로 삼진에 특화된 선수가 아니었다. 네 번 중 최다 삼진이 바로 이 경기였다.)
쿠바를 탈출한 스물 둘의 2년차 투수가 143개의 공을 지치지 않고 뿌려 매덕스를 완투로 제압한 건 희대의 사건이었다. 다만 에릭 그렉 주심의 ‘태평양 존’ 덕을 톡톡히 본 건 사실이다. 에르난데스에게 유독 넉넉했던 볼 판정은 지금도 회자되는데 좌타자 맥그리프를 루킹 삼진으로 돌려 세운 바깥쪽 커브는 우타자라면 몸에 맞을 수준의 공이었다. (에릭 그렉 주심은 이후 포스트시즌 무대에 서지 못했다.)
릴랜드 감독은 내친 김에 에르난데스를 월드시리즈 1선발로 투입했다. 이번엔 ‘불독’ 허샤이저와의 맞대결에서 타선의 도움 속에 승리투수가 됐다. 5차전에서도 허샤이저와 재대결해 6실점했지만 142개의 공을 뿌리면서 8회를 버텨 또 승리를 따냈다. 플로리다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끈 에르난데스는 챔피언십시리즈와 월드시리즈 MVP를 연달아 거머쥐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발간한 메이저리그 선수 백과사전에는 에르난데스 열풍이 불면서 분위기에 휩쓸린 기자단이 명백히 감정적으로 월드시리즈 MVP를 선정했다고 기록돼 있다. 휩쓸려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화제의 중심이었다. (박찬호의 활약이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덕에 그해 월드시리즈는 전례 없이 지상파 중계로 편성된 바 있다.)
쿠바 출신 선수가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기 어려웠던 시대적 환경까지 더해져 에르난데스의 활약은 야구계는 물론 외교적 파장마저 불러왔다. 마이애미의 쿠바 이민자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쿠바 현지 여론까지 들끓었다. 야구 스타의 해외 유출을 저지하던 쿠바 정부도 플로리다 구단과 주정부의 끈질긴 요청에다 동료 선수들의 탄원서까지 날아오자 3주의 논의를 거쳐 이례적으로 에르난데스의 어머니에게 일시 출국을 허가해줬다. 에르난데스 열풍이 입증될 만한 일화다.
에르난데스의 어머니는 항공편부터 경기장 이동까지 귀빈 대접을 받았다. 플로리다 구단은 에르난데스 어머니의 언론 접촉을 통제하는 대신 “아들을 만나 직접 마지막 경기를 볼 수 있어 행복하고 신에게 감사드린다”는 소감만 인용하도록 해줬다. 우여곡절 끝에 에르난데스가 월드시리즈 7차전 직전 30분간 어머니를 만난 것은 스포츠 명장면으로만 소화하기 아쉬운 장면이다. 당시만 해도 미지의 영역으로 인식되던 쿠바 야구에 대한 환상이 커지는 데에도 일조했다. (이후 1999년 쿠바 야구대표팀이 볼티모어와의 시범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신비감은 절정에 달했다.)
가을 DNA로 신선한 충격을 던진 리반 에르난데스는 이후 200이닝 시즌을 열 차례나 기록하며 대표적인 고무팔 투수로 활약했다. 다만 말로는 좋지 않았다. 은퇴 후 파산하면서 97년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와 MVP 트로피를 경매에 내놓았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에르난데스만은 못해도 예상치 못한 한 방으로 가을에 전설을 남긴 짐 레이리츠의 기억 역시 강렬하다. 평생 백업 포수였지만 1996년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대수비로 출전해 올스타 마무리 투수 마크 월러스에게 동점 3점 홈런을 때리면서 흐름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이 홈런 이후 반등한 뉴욕 양키스는 18년 만에 정상에 복귀했다 (공교롭게 이때도 애틀랜타가 희생양이 됐다.) 경기적인 의미 뿐 아니라 80년대부터 암흑기를 겪던 뉴욕 양키스를 메이저리그의 중심에 다시 올려놓은 상징성도 여전히 인정받는다. 레이리츠는 98년 샌디에이고에서, 99년에는 다시 뉴욕 양키스에서 개성 넘치는 타격 자세로 인상적인 포스트시즌 홈런을 터뜨려 가을 DNA를 언급할 때마다 회자되곤 했다.
범가너나 오티스처럼 원래 잘하던 선수가 가을 DNA까지 갖춰 위업을 이룬 사례들이 훨씬 유명하지만, 적은 표본에서 비롯된 편견에 굴하지 않고 명장면을 남긴 선수들의 기억에 더 애착이 가는 게 사실이다. 올해 KBO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터진 신민재의 끝내기 안타도 비슷한 느낌이다. SK 조동화부터 예전 해태의 김정수, 장채근에 롯데 유두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례들 모두 여전히 흥미로운 추억이다. 월드시리즈에서 벌어진 ‘블레이크 스넬 교체 사건’처럼 충분한 표본으로 근거를 갖췄다는 것이 가을 야구에서는 오히려 덫으로 작용하곤 한다. 확률과 통계가 정복하기 전에 결판나는 7전 4선승제가 유지되는 한 가을 DNA의 마력은 계속 발휘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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