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전훈칠
[전훈칠의 맥스MLB] '이 정도면 류현진의 향기가…' 차세대 에이스, 소형준의 2020년
[전훈칠의 맥스MLB] '이 정도면 류현진의 향기가…' 차세대 에이스, 소형준의 2020년
입력
2020-12-04 13:56
|
수정 2020-12-07 09:05
수식어가 넘쳐나는 야구계에서 '제 2의 류현진'이라는 말은 진부한 수준에 속한다. 최근에도 NC 구창모부터 롯데에 지명된 김진욱에, 더 거슬러 올라가면 노성호, 유창식도 류현진의 후계자라 부르곤 했다.
해당 선수들은 공통점이 있다. 일단 왼손 투수이고 구창모를 제외하면 프로 데뷔를 앞둔 유망주였다. 실제 투구의 유사성이나 경기력의 실체를 떠나 기대감이 큰 대형 왼손 투수라는 점을 강조한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류현진의 위엄만 더 부각되곤 했다.
그런데 진짜 류현진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지난 포스트시즌에서 나왔다. KT 소형준의 플레이오프 1차전이었다. ①커터를 주무기로 쓰면서, ②스트라이크 존 경계를 훑는 제구력에, ③연신 땅볼을 유도하는, ④담담한 표정의 투수. 여기에 6.2이닝 무실점이라는 결과까지. 그동안 오른손 투수라는 이유로 류현진과 엮이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이날은 분명히 류현진의 향기를 풍겼다.
소형준 스스로도 만족한 날이었다. 경기 영상을 다시 보면서 "인생 경기구나 싶었다"고 했다. 컨디션 자체가 유독 좋다 보니 실투나 몰리는 공도 파울이 됐고 운까지 따라줬다고 돌아봤다. 삼진 4개를 잡았는데 이 중 바깥쪽 투심으로 박건우를 삼진 처리한 장면을 다시 보고는 '진짜 나이스볼'이라며 감탄하기도 했다. 한 경기에 자신이 생각한 대로 들어가는 공이 몇 개 되지 않는데, 제대로 공이 들어가 "기분이 엄청 좋다"고 했다. (몸쪽 투심으로 잡아낸 김재호 삼진은 의도대로 들어간 공이 아니었다고 했다.)
신인왕 투표에서 만장일치가 되지 않은 게 아쉬울 만큼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소형준. 데뷔 첫 시즌을 앞두고 생각했던 목표를 다 이뤘다니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소형준의 2020 시즌은 전반기와 후반기를 나눠 평가하는 게 보통이다. 7월을 평균자책점 5.90으로 마무리하면서 한계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2주 휴식기를 거치면서 후반기에 8승 1패를 기록할 정도로 달라졌고 결국 평균자책점을 3.86까지 보기 좋게 만들어놓고 시즌을 마무리했다.
쉬는 기간에 습득한 커터가 비결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얘기다. 고교 시절부터 슬라이더와 커브의 각이 비슷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각이 작은 구종을 던지고 싶었고, 시간이 허락되면서 집중적으로 연습했다는 내용이다. 완성된 커터는 아니라고 느꼈지만 기존 슬라이더를 던져서 맞느니 차라리 새로운 걸 던져서 맞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실전에서 구사했다고 한다. (커터를 던질 때는 그립보다 손 전체가 돌아 나오는 모양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소형준 자신은 단순히 구종 습득만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추상적일 수 있지만 마음가짐의 차이가 후반기를 바꿨다고 했다. 시즌 초에는 뚜렷한 구상 없이 그저 막연하게 잘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개막 이전 인터뷰에서도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가다듬고 있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됐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정말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이왕 휴식기가 주어졌으니 이전까지의 결과는 잊고 새로운 시즌을 시작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후 마운드에 올라가 투구하는 행위를 반복하는 동안 생각을 거듭한 것이 커터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성적으로 이어졌다.
다만 여전히 결정구가 없다는 것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라고 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타자가 치기 어렵게 한 것일 뿐, 타자가 칠 수 없는 결정구는 아직 없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구종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이미 가진 것을 어떻게 배합해야 더 위력적일지에 대한 고민이라고 했다. 자신만의 ‘결정구’를 던져야만 지금보다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열아홉 신인이 시즌 도중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자발적으로 멘탈을 정리한 것 자체도 대단한데, 현실에서 새로운 구종을 시험해가며 경기력으로 표출한 것을 넘어, 한 단계 도약을 위한 고민까지 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조심스럽지만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자신만의 동력을 갖췄다는 점도 류현진과 비교할 수 있는 공통점 ⑤번으로 언급해도 될 것 같다.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결국 세밀한 이미지 트레이닝과 맞닿아 있다. 소형준은 자기 전에 누운 상태로 여러 상상을 한다고 했다. 가상의 선발 등판 경기를 설정해두고 몸을 풀어가는 과정부터 마운드에 올라 타자를 상대하는 장면을 떠올리다가 잠이 든다고 했다. 바깥쪽에 꽉 차는 공을 던져 좋은 결과가 나오는 상상을 하다 보면 실제 그런 공이 나올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면 야구 외적인 생활에도 나름의 원칙이 있을 법하다. 평소에도 스스로 유지하거나 지키려고 하는 부분이 있는지 물었는데, 조금은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친구들이나 동생들과 밥을 먹으면 무조건 나서서 계산한다고 했다. 야구든 아니든 마음을 잘 쓰면 훗날 어떤 식으로든 돌아온다고 생각에서다. 사실 엉뚱한 얘기라고만 할 수는 없다. LA 에인절스의 오타니도 고교 시절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한 노력 가운데 독서와 주위에 대한 배려는 물론 쓰레기 줍기까지 잘하겠다고 자기 자신과 약속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행운마저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한 진정성있는 접근이라고 포장하면 어떨까?
2주 휴식기만으로도 의미 있게 변신한 소형준에게 오프시즌은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다. 프로 첫 해 많은 투구를 소화한 만큼 어깨와 팔꿈치 회복에 신경 쓰는 동시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근력 강화에도 신경을 쓸 것이라고 했다. 팬들의 큰 기대를 늘 인식하고 있기에 올해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작년 청소년 대표팀 시절, 그리고 올 시즌 초만 해도 LA 다저스의 워커 뷸러를 닮고 싶다던 소형준. 첫 시즌을 겪으면서 이제는 특별한 롤모델을 떠올리는 대신 자신만의 투구 철학을 세워가고 있다. 선발 예고가 전날 떴을 때 내일은 이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투수가 되고 싶다는 소형준.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지만 보면 볼수록 기대를 끊기 어렵다.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