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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훈칠의 맥스MLB] 일상에서 무르익은 빅리거의 성공 비결

[전훈칠의 맥스MLB] 일상에서 무르익은 빅리거의 성공 비결
입력 2021-01-27 11:38 | 수정 2021-01-27 11:41
기대 받는 '타율 꼴찌' 에반 화이트

기대 받는 '타율 꼴찌' 에반 화이트

지난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규정 타석을 채운 선수 가운데 타율 꼴찌. 하물며 포지션마저 1루수라면 도저히 포장해주기 어려운 선수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선수에 대한 평가는 좀 다르다. 탁월한 수비로 공격력에 대한 아쉬움을 상쇄하고 있는 1루수. 바로 시애틀 재건의 중추로 주목받는 에반 화이트다.

마이너리그에서 1루만 전담한 유망주라면 장타력이 폭발하지 않는 이상 매력이 떨어진다. 경기 장면을 직접 보지 않았더라도 그 자체로 수비력에 흠결이 있는 선수로 분류된다. 전통적인 1루수의 가치보다 다양한 포지션 소화 능력이 인정받는 현대 야구에서는 더 그렇다.

그런 면에서 화이트는 좀 다르다. 드래프트 당시부터 ‘뛰어난 1루 수비’가 먼저 언급됐다. 1루 수비 유형도 차별화된다. 현역 1루수 가운데 수비 좋은 선수가 여럿 있겠지만, 아드리안 곤잘레스처럼 안정적인 포구로 인정받는 경우가 대다수다. 화이트는 다르다. 1루수로는 보기 드문 화려함을 과시한다. 과거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 뛰었던 J.T.스노우처럼 안정감을 넘어 역동적인 자태로 명장면을 만들어낸다.
수비의 결이 다르다

수비의 결이 다르다

골드글러브는 수비 전문 시상이면서도 타격 능력에 따른 유명세가 표심에 개입되는 한계를 안고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루수로 28경기만 뛰고도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99년 팔메이로다. 정반대 경우도 있다. 97년부터 3년 연속 내셔널리그 유격수 황금장갑을 가져간 뉴욕 메츠의 레이 오도네스는 형편없는 타격 능력이 오히려 수비력을 돋보이게 만든 경우라고 본다. 97년과 98년에는 (타율이 아닌) 출루율은 물론 장타율마저 2할대를 기록해 메이저리그 최저 타율선을 뜻하는 '멘도사 라인'을 자주 언급하게 했다. (현대 야구의 통계 지표로 봐도 오도네스의 수비력이 최상급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3년을 내리 수상한 것은 오도네스의 극단적인 물방망이 캐릭터가 지닌 화제성 덕이었다고 생각한다.)

2020년 골드글러브는 단축 시즌이라는 점을 고려해 투표 대신 통계 수치로만 포지션별 최종 후보를 선정했다. 그리고 화이트는 아메리칸리그 1루수 수상자로 선정됐다. 신인 선수가 1루수 부문 수상자가 된 것은 1957년 골드글러브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초다. 세이버메트릭스 만능론까지 주장할 필요는 없지만 타격 부진을 따져 묻는 사람의 편견 없이 수비력만으로 결실을 맺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시애틀의 디포토 단장은 화이트가 빅리그 데뷔도 하지 않은 지난 2019년 11월에 6년간 2천 4백만 달러의 장기 계약을 맺었다. 메이저리그 경력이 없는 선수가 다년 계약을 한 것은 휴스턴의 싱글턴과 필라델피아의 킹거리,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히메네스에 이어 화이트가 역대 네 번째다. 화제의 중심에 서고 싶어 하는 디포토 단장의 욕망이 드러난 계약이라고 폄하되기도 했지만 화이트의 골드글러브 시즌을 보면 아직 단정하기 조심스럽다.
평소 높게 평가받은 인성도 조기 다년 계약의 이유가 됐다

평소 높게 평가받은 인성도 조기 다년 계약의 이유가 됐다

화이트는 자신의 수비에 대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 편이다. 2021년 신년을 맞아 진행한 시애틀 구단 전담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수비력으로 성장한 배경을 공개하기도 했다. 자신은 어릴 적부터 배트로 타격하는 것보다 글러브로 공을 받는 행위에 관심이 컸다고 했다. 가족들과 야외에 나갈 때면 자신이 배트를 휘두르기보다 아버지에게 땅볼을 쳐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라고 한다. 야구 선수로 성장하면서도 또래 선수들과 관점이 달랐던 게 수비력으로 발현된 계기가 아닐까 화이트는 짐작했다.

화려한 수비로 특화된 화이트에게 또 하나 특이점이 있다면 야수로는 드물게 좌투우타라는 것이다. 오른손잡이가 타격과 주루의 이점을 얻기 위해 후천적으로 좌타석에 들어서도록 길러지는 경우는 흔하지만, 반대로 왼손잡이가 우타자로 자리잡는 것은 희귀하다. 2000년 이후 주목할 만한 좌투우타 선수라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리키 헨더슨 이외에 라이언 러드윅과 코디 로스가 떠오르는 정도다. (류현진의 경우 오른손잡이면서 왼손으로 투구하는 독특한 좌투우타인데, 타격 기회가 적다는 점에서 조금 느낌이 다르다. 투수로는 랜디 존슨이나 테리 멀홀랜드 등 사례가 있는 편이다.)
아동용 골프채가 좌투우타로 이어졌다

아동용 골프채가 좌투우타로 이어졌다

화이트의 좌투우타 역시 성장 배경과 관계가 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집 뒷마당에서 온갖 놀이를 하던 화이트에게 골프채가 쥐어진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화이트의 사촌 형을 주려고 만든 어린이용 골프채는 당연히 오른손잡이용이었다. 그 골프채로 화이트가 골프공을 치는 것 뿐 아니라 각종 타격 행위를 해댄 탓에 야구에서도 자연스럽게 우타석이 편해졌다는 조금은 싱거운 내용이다. 본격적으로 야구를 하면서 화이트의 아버지는 여러 차례 스위치 타자가 될 것을 권유했지만 화이트는 고집을 부렸다. 스스로 오른손 타석을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 이외에 '좌투우타'로 뭔가 독특해진 프로필마저 좋았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수치화하기는 커녕 확인조차 쉽지 않은 어린 시절의 몇 가지 경험이나 습관으로 메이저리그 선수를 설명하는 것이 무리수일 수 있다. 그러나 의외로 적지 않은 선수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정체성 일부를 설명한다는 게 흥미롭다.

방금 좌투우타로 언급된 류현진은 현역 최고의 제구력을 지닌 선수로 지목해도 무방하다.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후에는 제구력의 비결을 묻는 어떤 질문에도 구체적으로 답한 바 없지만 한화 시절에는 자신만의 소소한 얘기를 들려준 바 있다. 류현진은 KBO리그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던 지난 2010년 8월 MBC 시사매거진 2580과의 인터뷰에서 "집에다 그물망을 만들어서 구멍을 뚫어가지고 거기다 집어넣는 연습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메이저리그 무대에 서보는 것이 꿈이라고 수줍게 말을 이어가기도 했다. 사이영상을 논하는 지금 돌아보면 격세지감이다.
지난 2010년 자신의 제구력의 비결을 언급한 류현진

지난 2010년 자신의 제구력의 비결을 언급한 류현진

현역 최고의 제구력으로 류현진을 꼽는다면 역대 최고로는 그렉 매덕스를 떠올리는 게 당연하다. 초인적인 제구력 탓에 오히려 투심 패스트볼의 현란한 구위가 묻힐 정도로 매덕스는 ‘제구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겼다. 이런 매덕스조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어린 시절 놀이를 떠올렸다. 그렉 매덕스는 투수 코치로 잘 알려진 친형 마이크 매덕스와 어렸을 때 '홈런 더비'라 부르는 게임을 자주 즐겼다고 했다. 의자 하나를 홈 플레이트 삼아 한 명은 던지고 한 명은 치는 놀이인데, 타자가 헛스윙하거나 투수가 공을 의자에 맞히면 아웃이 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렉 매덕스는 "형의 방망이를 피하는 동시에 의자에 맞히기 위해 애쓴 순간들이 엄청난 훈련이 됐다"고 돌아봤고, 마이크 매덕스는 “두 꼬마들이 어린 시절부터 로케이션의 중요성을 체득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매덕스와 달리 류현진에게 반갑지 않은 연관 검색어로 등장하는 콜로라도의 놀란 아레나도 역시 이 분야에서 함께 언급될 만한 얘깃거리가 있다. 데뷔 후 8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역대급 수비력은 물론 3년 연속 130타점을 기록한 최초의 3루수로 기록될 만큼 폭발적인 타력을 지닌 아레나도. 성적은 물론 경쟁을 즐기는 태도와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팬들의 호르몬 분비를 촉진시키는 현역 대표 스타 선수다.
경쟁을 즐기는 아레나도

경쟁을 즐기는 아레나도

평소에도 경기 전 타격 훈련을 가장 많이 하려 애쓰고, 갖가지 펑고를 다양하게 받아내야 직성이 풀린다는 아레나도는 자신의 이런 기질이 사촌들과의 놀이 문화에서 비롯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레나도는 어린 시절 두 명의 친형제에다 사촌 7명까지 모두 차로 10분 거리에 살았는데, 이들 10명이 시끌벅적하게 동네 야구를 하고 새벽 1시까지 탁구를 치는 등 이웃들이 괴로울 정도로 거칠게 경쟁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다섯 살 때부터 부모님이 속을 썩을 정도로 놀아댄 결과가 현재 투쟁심의 원천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런 환경에서 자랄 수 있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축복이었다고 했다.

그 10명의 말썽꾼 가운데 한 명이 콜로라도 내야수 조시 푸엔테스다. 푸엔테스는 사촌 아레나도가 동네 야구를 하면서도 자신이 일일이 판정에 개입하고 커미셔너처럼 경기를 지휘하고 스스로 경기 MVP까지 선정하는 등 북치고 장구치는 행위를 주도했다는 뒷얘기도 털어놨다. 평범한 친구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무키 베츠는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선수다

무키 베츠는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선수다

현역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인 무키 베츠는 어린 시절 TV 요리 프로그램을 즐겨 보고 자주 따라하다 식재료를 망쳐 부모님께 여러 차례 혼난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시행착오를 겪으며 얻은 경험 덕에 메이저리그에서 새로운 타격법을 익힐 때 두려움을 줄일 수 있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베츠는 "누군가 성공에 대해 조언을 듣고 싶어 한다면 뭐든 일찍 시작하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인과 관계를 수치로 입증해 야구의 단면을 풀어놓는 것도 근사하지만 때로는 당사자가 직접 털어놓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요소로 성공의 일부를 알아가는 것도 흥미롭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지올리토는 배우였던 어머니가 집에서 대본 연습하는 장면을 보며 결과보다 준비 과정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고 한 적도 있다. 선수들이 하루 하루 성장하는 장면을 모두 지켜볼 수는 없다. 모든 순간이 의미있다고 과장할 수도 없다. 그래도 어떤 선수의 평범한 하루가 훗날 기막힌 성공 비결로 완성되기 위해 무르익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관심이 간다. 약간의 공감만 이뤄진다면 그 정도 의미부여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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