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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훈칠의 맥스MLB] KBO 외국인 선수들이 말하는 한국 야구, 그리고 적응에 관하여
[전훈칠의 맥스MLB] KBO 외국인 선수들이 말하는 한국 야구, 그리고 적응에 관하여
입력
2021-04-30 11:53
|
수정 2021-04-30 14:00

롯데에서 2년째 뛰는 마차도
지난 2월, 박찬호가 샌디에이고와 계약한 김하성에게 건넨 조언이라며 화제가 된 말이다. 빅리그 성공에 있어 적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찬호는 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그에서 산전수전 겪어가며 얻은 생생한 경험을 모아 김하성의 귀에 피가 날 때까지 들려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김치와 마늘 냄새 때문에 겪었던 에피소드도 빼놓지 않았다.

ESPN의 특집 인터뷰에 참여했던 빅리거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가족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전화 카드를 사러 무작정 주유소에 갔다가 정작 영어 한마디 못했다던 주리스 파밀리아. 핫도그와 샌드위치만 먹어야 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1년 만에 7kg이 빠졌고, 그 바람에 어머니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던 우발도 히메네스. 주위 사람들이 웃을 때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따라 웃는 게 고역이었다는 엘비스 안드루스. 지극히 소소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마냥 웃을 수 없던 이야기들이다.

몬테로는 2017년 미국 시민권자가 됐다.
국내에도 ESPN의 특집 기획물과 비교할 만한 자료가 나왔다. KBO리그 외국인 선수 영입에 직접 관여하는 관계자가 'KBO 외국인 선수들의 재계약에 적응이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로 논문으로 펴낸 것이다. 그동안 외국인 선수들의 한국 무대 적응 이야기는 언론 기사를 통해 표피적으로 다뤄지는 정도였다. 그조차 본질적인 내용보다 기행이나 신변잡기 위주로 소개된 것도 사실이다. 실제 외국인 선수들이 밝힌 자신의 생각을 현실감있게 다룬 해당 논문을 들여다봤다.
ESPN과 마찬가지로 이 논문에서도 외국인 선수의 적응을 크게 야구 내적인 요소와 야구 외적인 요소로 나눠 접근하고 있다. 공인구의 특성과 동료들과의 관계, 팬들의 응원 문화가 야구 내적인 요소라면 음식과 언어, 주거 환경과 향수병은 외적인 요소다.

스나이더는 공인구 덕을 봤다고 밝혔다.
야구 내적인 요소 중 공인구는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다. KBO리그 공인구는 메이저리그 공인구보다 반발력이 높고 덜 미끄러운 것으로 통한다. (끈적인다고 표현한 선수도 있다.) 실제 한국 야구공을 던져 보니 직구보다 변화구를 구사하는 데 적합하다고 느낀 한 외국인 투수는 자신의 투구 스타일을 과감하게 바꿨다고 했다. 공인구의 특성이 구종 변화를 이끌어낸 사례는 많이 알려진 편이다. (참고로 키움 구단은 새로 계약한 투수가 첫 캠프에 합류하기 전에 미리 공인구를 보내 적응을 돕는다고 한다.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캠프 시작 전에 미리 공을 보내주는 구단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공이 아니라 그라운드가 구종을 좌우했다는 내용은 꽤 흥미롭다. 공인구처럼 마운드의 흙 역시 KBO쪽이 무르고 연하다. 한 투수의 경우 미국에서는 그라운드가 단단하기 때문에 공을 뿌리는 과정에서 마운드를 차고 나와 점프하듯 도약하는 힘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한국 마운드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매우 부드러운 마운드가 오히려 투구할 때 발을 붙잡는 느낌을 줄 정도라고 했다. 이 때문에 직구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다고 느꼈고 결국 슬라이더를 적극 구사하는 방식으로 대처했는데 이것이 통하면서 KBO리그에서 성공적인 시즌을 치렀다는 것이다. 그라운드의 특성과 구종의 조합을 연결시켜 말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지만 미국 무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직구 구위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적응과 연관시켜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마운드의 특성은 생각보다 더 중요했다.
팀 동료와의 관계는 외국인 선수들이 적응 과정에서 가장 자주 언급한 소재로 나타나 있다. 인간적인 관계에 큰 비중을 두는 한국 선수들이 경기 전후 관심을 갖고 신경 써주는 부분에 대해 외국인 선수 대다수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승팀 주장 양의지의 품격
선배를 우대하고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다. 특히 어린 선수들로부터 일상적으로 인사를 받으면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며 이런 인사 문화가 미국에서도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는 선수조차 있었다. (이 선수는 미국의 젊은 선수들이 무례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물론 소수의 반대 의견도 있었다. 유독 베테랑들은 자신들과 거리를 두는 경우가 많았고, 클럽하우스 안에서 선후배 간에 위계질서가 확립된 장면도 낯설었다며 한국적인 동료 문화에 대한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팬과 응원 문화에 대한 인식은 좋은 편이다.
야구 외적인 적응 요소라면 대표적으로 음식이 꼽힌다. SK의 2018년 우승 멤버인 앙헬 산체스는 KBO리그 진출 첫 해 한국의 음식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무려 10kg이나 빠졌다. (입이 상당히 짧았던 것 같다.) 이 정도 신체 변화라면 일반인도 태연하기 어려운데 경기력을 발휘해야 하는 직업 선수로서 더 힘겨웠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산체스가 그대로 포기하는 대신 구단의 배려 속에 자신만의 적응법을 찾으면서 반등에 성공했고 결국 일본 프로야구 진출까지 성공했다는 것이다.

10kg 감량 사태를 견뎌낸 산체스
음식과 더불어 야구 외적인 적응 요소로 언어를 빼놓을 수 없다. ESPN 특집 기획물에는 대다수의 중남미 선수가 영어 때문에 힘겨웠던 일상의 기억으로 가득하다. 다만 외국인 선수 모두에게 개인 통역을 제공하고 있는 KBO리그 상황은 조금 다르다. 언어 때문에 일상을 통제받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간혹 통역을 거치지 않고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해 신뢰를 쌓았다는 선수도 있다. 간단한 한국어 정도는 직접 구사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SSG의 로맥이 대표적인 사례다.

적응을 넘어 '한국화'된 로맥
한국에 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미국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선수의 경우 시차로 인해 향수병이 더 심해진다고 했다. 전화로조차 일상을 공유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영향이 꽤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시차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는데 미국 현지 새벽 3시였다거나, 부모님도 자신이 단잠에 빠져 있는 새벽 5시에 전화를 걸어왔다는 게 외국인 선수들에게는 마냥 웃어 넘기기 힘든 일이었던 것 같다. 결국 이런 사소한 부분이 쌓여 적응 과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로 언급됐다. 기혼 선수의 경우 자녀를 동반하지 못했을 때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작년 삼성의 뷰캐넌이 비슷한 상황에서 완봉승을 거둔 이후 눈물의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는 상황이 한국 적응에 가장 큰 도전 과제였다고 말한 선수도 있었다. 코로나19 여파로 2주의 격리 기간이 의무화된 상황에선 더욱 그랬을 것이다.
거주 환경이나 편의시설도 무시할 수 없는 적응 요소였다. LG에서 뛰었던 한 외국인 선수의 경우, 눈을 뜨면 온갖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지하철 체계가 월등히 우수하며 IT 환경마저 완벽에 가까운 서울 생활이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했다. 논문에 언급돼 있지는 않지만 귀화 의사를 드러낸 롯데의 마차도 역시 한국의 치안과 거주 환경 등 야구 외적인 요소에 큰 만족감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한 지방 구단 소속의 외국인 선수는 자신의 숙소 근처에 별다른 식당 하나 없고 대중교통도 갖춰져 있지 않아 경기 이외의 시간을 보내기 힘들었다고 했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지방 구단 핸디캡'이 실제 외국인 선수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장 옆 지하철도 적응을 돕는다는 얘기다.
외국인 선수들을 평가할 때 경기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래도 논문의 인터뷰를 접하면서 그들이 공을 던지고 배트를 휘두르는 행위를 그라운드에서 펼치기까지 각자의 적응 과정도 조금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KBO리그가 갈수록 외국인 선수들에게 더 뛸 만한 무대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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