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있는 폭로가 이어지고 있는 지금, 몇 년 뒤에는 사건이 잘 해결돼 있을까?”
이 궁금증에서 취재는 시작됐습니다. 과거에도 피해자가 직접 성추행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건 자주 있었던 일이죠. 그럼 그 이후에는 이 사건이 제대로 처리됐는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어느 목사의 성추행
처음 찾았던 사람은 전병욱 목사였습니다. 서울 삼일교회에서 10년 넘게 담임목사를 맡았었던 그는 신도 10여 명이 그에게 성추행 당했다고 폭로하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는 말을 남기고 담임목사직을 사임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1년 7개월 만에 서울 마포구에 새로 교회를 열고 지금까지 6년 째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교단이 전 목사에게 내린 징계는 ‘설교 중지 2개월, 공직 금지 2년’입니다. 교단의 직책을 맡지 못 하는 공직 금지는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건데요. 이후 징계 결과에 반발한 삼일교회 측이 곧바로 재심을 요구했는데도 교단은 기각시켜 버립니다.
전 목사는 형사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성추행으로 징역형을 받았다면 교도소에 갔을 테니 목회를 계속할 수 없었겠죠. 그런데 전 목사의 성추행이 처음 폭로된 건 2010년으로 당시는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가 폐지되기 전이었습니다. 피해자가 직접 고소해야만 처벌할 수 있었던 거죠. 또, 피해자들이 뒤늦게 용기를 낸 경우도 있어서 공소시효가 지나버린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전 목사가 형사 처벌을 받는 건 현재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다만, 삼일교회는 사임할 때 지급했던 전별금 일부를 돌려달라는 민사 소송을 제기해서 지난해 9월 최종 승소했는데요. 법원이 전 목사에게 전별금을 돌려주라고 판결하면서 성추행이 인정된다고 판결문에 적시하기는 했습니다.
성추행 목사 옹호, 하나님을 위해서?
취재를 하며 인상적이었던 점은 교단과 교인 모두 전 목사를 보호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교단 측이 징계를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을 때, 한 동료 목사가 "사람은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걸 자꾸 파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우리의 모습이 더 나쁘지 않습니까?"라고 발언한 것이 상징적입니다. 세상에 목사의 성추행을 폭로하는 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죠. 다른 동료 목사는 전 목사가 새로 연 교회에 와서 “세상이 전병욱 목사를 공격하지만, 우리 노회는 전 목사를 지키겠다”고 말하며 뜨거운 동료애(?)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전 목사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마음도 궁금했는데요. 직접 교회를 찾아가 만났던 교인들은 아예 이 문제를 언급하는 걸 꺼렸습니다. “취재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 “그 사건과 관련해 할 말이 없다”라는 말로 일관했는데요. 교인들도 과거 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이 사실을 취재하는 것이 곧 교회에 대한 공격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교단과 교인들의 철저하게 전 목사를 옹호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어떻게 그가 당당하게 목회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목사의 성추문, 나아가 종교계의 성추문이 끊이지 않는 이유에도 이런 배경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관련 뉴스 보기 [폭로에만 관심 결과는 '용두사미'…외면하는 사회]
교수님, 왜 그러셨어요?
다음에 찾아간 사람은 수도권 대학에 재직 중인 이 이무개 교수였습니다. 이 교수는 2016년에 성추행 혐의로 피소됐는데요. 피해자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이 교수에게 개인 레슨을 받았던 제자였습니다. 레슨 과정에서 부적절한 신체 접촉이 있었다는 것이 피해자의 주장인데요. 당시 이 사건을 다수의 언론이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건 1년 반이 흐른 지난달 해당 대학에 직접 찾아가봤더니 이 교수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마침 졸업식 행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강단에서 졸업생들에게 일일이 축하인사를 건네고 기념 촬영도 하더군요. 연구실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작년 3월 학교 측이 ‘정직 3개월’ 징계를 내린 뒤에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강의시간표를 확인해보니 이 교수는 이번 학기도 수업을 맡습니다.
성추행이 아닌 명예훼손으로 징계내린 학교
학교 측에 징계에 대해 물어보니 정직 3개월은 성추행이 아니라 학교 명예를 훼손한 것에 대한 징계였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직 재판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성추행에 대한 징계는 내릴 수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학교가 수사 기관은 아니니까 성추행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하지만 2016년 경찰이 이미 성추행 혐의가 있다고 판단을 하고 검찰에 사건을 넘긴 상황에서 수업을 계속 맡기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번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이 교수의 수업을 들어야 합니다.
학교 측은 성추행 재판 결과가 나오면 다시 징계를 내리겠다고 밝혔는데요. 문제는 재판 결과도 기약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검찰이 사건을 처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요. 경찰은 이미 1년 4개월 전에 사건을 검찰에 넘겼습니다. 성추행 혐의가 있으니 기소해달라는 게 경찰의 의견이었습니다. 하지만 검찰에 사건이 넘어간 이후 담당 검사가 계속 바뀌면서 재판에 넘어가지 않고 있습니다. 담당 검사는 지난달에 또 바뀌어서 처리는 계속 늦어지고 있는데요. 이 때문에 사건이 잘 처리될 거라고 생각했던 피해자도 초조해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는 사건 진행에 도움이 될까 싶어 최근에는 변호사까지 새로 선임했습니다.
폭로하고 고발하면 사건이 제대로 처리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미투 운동’도 더 활발해질 수 있겠죠. 하지만 이 사건에서는 사법기관과 학교 모두 피해자를 보호하고, 추가 피해를 예방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몇 달 전 제 아내가 집에서 자신이 쓴 신고서를 조심스럽게 보여주더군요. 5년 전에 전 직장을 다닐 때 협력업체 직원에게 성희롱을 당했는데, 이 사실을 신고하는 글이었습니다. 성폭력이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는 사실을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저는 흔쾌히 신고하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어떤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라는 걱정과 함께 사건이 제대로 처리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내는 또 상처를 받을 테니까요. 하지만 되돌아보면 이런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고 드러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은 없으니까요. 아내가 신고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도 자신의 침묵이 가해자가 다른 여성에게 비슷한 일을 저지르는 기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투, 제대로 된 처벌 없인 공허한 고백일뿐
제가 할 일은 신고한 뒤에 일어날 수 있는 후폭풍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사건이 얼마나 잘 처리되는지 함께 감시하는 게 아니었을까요. 시간을 되돌린다면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이었을까 여전히 고민스럽기는 합니다. (아내는 신고 후 해당 업체 직원을 직접 만나 조사를 받았고, 최근 업체는 자체 조사 결과에 따라 징계를 내리기로 했다고 통보했습니다.) 최근 용기를 내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분들이 잇따르고 있는데요. 이 폭로들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사람의 기자로서 나아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일이 이제 저에게 남은 듯합니다.
사회
배주환
[뉴스인사이트] 성추행 폭로 그 후…남겨진 고민
[뉴스인사이트] 성추행 폭로 그 후…남겨진 고민
입력
2018-03-04 11:48
|
수정 2020-01-03 10:49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