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부모 찬스를 고발합니다.”
회사에 제보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국내 최대 공모전인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김 모 작가가 자신의 아들, 딸, 아내 그리고 제자들에게 상을 줬다. 모두 17명에 달한다.”
실제로 미술대전 측이 공개한 심사위원 명단엔 김 모 작가가 있었습니다. 2차 심사위원장을 맡아 공예 작품을 심사했습니다. 그리고 수상 명단에 아들, 딸, 아내로 지목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미술협회 등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작품을 출품한 주소도 모두 김 작가의 사무실로 동일했습니다. 상을 수상한 김 작가의 가족, 제자는 모두 18명에 달했습니다.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미술 가족? 알고 보니‥
저명한 공예작가라는 김 작가가 대한민국 미술대전에만 관여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김 작가와 그 가족들의 홈페이지, 공개된 SNS, 과거 수상 이력을 찾아봤습니다. 김 작가와 그의 가족들이 과거에도 여러 차례 공모전에 출품을 하고 상을 받았다는 기록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25살 공대생이라는 아들 김 씨는 지난해 열린 정수미술대전에 나무 장식장을 출품해 최고상인 문화체육부장관상과 상금 700만원을 받는 등 수상 이력이 상당했습니다. 젊은 나이에도 작품성을 인정 받는 아들과 저명한 공예작가 아버지, 얼핏 보면 대단한 공예가 집안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들 김 씨의 수상작 사진을 들여다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됐습니다. 분명 처음 보는 작품인데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김 작가의 홈페이지를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9년 전 김 작가가 홈페이지에 게시한 글 속에서 한 나무장식장 사진을 찾았습니다. 아들 김 씨가 대상을 수상한 작품과 똑닮은 장식장이었습니다. 나무로 덧댄 서랍 장식만 다를 뿐, 가운데에 파인 곡선 무늬 구멍, 한옥 구조을 참고해 만들었다는 장식장의 지붕, 아래를 받치고 있는 무지개 모양 조각까지 모두 같았습니다. 미술계 ‘부모찬스’, 어떻게 가능했을까?
정수미술대전의 공모요강은 '창의적이고 순수한 국내외 공모전에서 발표되지 않은 작품'을 선발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전혀 창의적이지도, 순수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작품이 대상을 수상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심사 방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봤습니다. 취재 당시 정수문화예술원 홈페이지에는 대회를 주관하는 운영위원 목록이 공개돼있었습니다. 아들 김 씨가 출품한 공예 부문의 운영위원은 두 명이었는데, 그중 목공예 부문 운영위원은 다름 아닌 아버지 김 작가였습니다. 정수문화예술원 측에 요청해 공예 부문 심사위원 목록도 따로 받아 확인해봤습니다. 공예 부문 심사위원은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 목공예와 칠공예는 심사 위원 두 명이 담당한다고 문화예술원 측은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엔 이00, 김 작가의 아내이자 대상 수상자 김 씨의 어머니 이름이 있었습니다. 즉, 아들 김 씨의 작품을 심사하는 심사위원 두 명 중 한 명이 김 씨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먼저 이런 미술대전에선 이사장 등으로 구성된 조직위원회가 운영위원을 뽑습니다. 운영위원은 "조직위 관계자의 지인 작가 또는 주로 제자가 많아서 작품을 많이 출품시키거나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선정된다"는 게 주최측의 설명이었습니다. 아버지 김 작가는 작품을 많이 출품시키는 영향력 있는 작가라는 이유로 운영위원에 뽑혔다고 합니다. 여기서 운영위원들은 직접 심사에 관여하지 않지만, 심사위원을 뽑는 권한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 김 작가는 당시 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아내 이 씨를 포함한 7명을 추천했고, 이 중 4명이 1차 심사에, 한 명이 2차 심사에 들어갔습니다. 이 2차 심사에 들어가 최우수작부터 특선작까지 심사한 사람이 다름 아닌 어머니 이 씨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아버지 김 씨는 올해 개최된 21회 정수미술대전에서도 운영위원을 맡고 있었고, 이번 대회에도 김 작가의 아들과 딸이 작품을 출품해 1차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아버지 김 작가가 운영위원으로 참여한 또 다른 사례를 살펴봤습니다. 그러자 2017년에 김 작가가 같은 대회에 운영위원으로 참가하고, 아들 김 씨가 작품을 출품해 최우수상인 경북도지상과 상금 500만원을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최우수상 작품도 나무 장식장이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품 사진을 찾아보니, 이 역시 대상 수상작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한옥을 본따 만든 지붕 구조에 가운데 곡선 무늬까지 똑닮았습니다. “미술계 ‘상 나눠먹기’에 실망해 젊은 작가들은 떠난다”
첫 보도가 나간 뒤 미술계 종사자들의 제보가 이어졌습니다. 이런 제보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같은 미술 공모전에서 ‘상 나눠먹기’가 특정 개인에게서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대한민국 미술대전을 주관하는 집행부가 심사에 관여하고, 임의로 상을 준다고 하나같이 말했습니다. 이번에 보도된 김 작가의 경우 가족과 제자를 너무 '대놓고' 챙겨줘서 그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올 해 개최된 대한민국 미술대전의 '비구상 부문'에서는 심사위원들이 뽑지 않은 작품들이 수상작으로 추가됐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심사위원 7명이서 14점을 특선 수상작으로 골라야 하는데, 집행부 측이 임의로 작품을 추가로 뽑고 순위까지 정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한 심사위원은 집행부 측의 일방적인 결정에 공개적으로 반발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당시 심사에 참여했던 복수의 심사위원들과 직접 통화를 했습니다. 이들 모두 “1인당 2점씩 모두 14점을 특선 이상 수상작으로 뽑았다”고 말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14점으로는 부족해 각자 한 점 씩 더 뽑아, 21점을 뽑은 것 같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홈페이지에 올라온 대상부터 특선까지의 수상작은 46점이었습니다. 21점을 뽑았다고 한들 실제 수상작은 심사위원들이 뽑은 것보다 2배 이상 더 많았던 것입니다. 7년 전 미술대전 심사 직전 미술협회 직원으로부터 뽑아줘야 할 작품 사진들이 담긴 종이봉투를 건네받았다는 심사위원의 제보도 있었습니다.미술계 종사자들은 이런 사실이 이미 미술계에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라인’도 없고, 돈도 없고, 저명한 작가 부모님이 없는 젊고 가난한 작가들은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출품할 생각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한 미술계 종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런 공모전에 출품했다가 낙선한 젊은 작가들이 미술계를 떠나는 경우도 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한때 미술계 등용문이라 여겨졌던 ‘대한민국 미술대전’이 일부 임원, 심사위원들의 농간 때문에 권위가 무너지고, 이젠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두렵지만 미술계 개혁 위해 용기내겠다"
이런 의혹에 대해서도 미술협회 측은 부인했습니다. 올해 개최된 미술대전 비구상 부문의 추가 선정작은 심사위원과 합의해서 결정한 것이지, 집행부 임의로 추가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편 7년 전 개최된 미술대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는 입장을 전했습니다.
보도가 나간 뒤 ‘미술계는 원래 다 썩었다’, ‘공모전은 원래 공정하지 못하다’는 식이 반응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보도를 준비하면서 미술계가 탈바꿈될 수 있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그 가능성은 부조리를 목격하고 이를 바꾸기 위해 언론에 알린 한 작가, 과거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을 때 경험한 문제점을 제보해준 전직 심사위원, 미술대전 출품 당시 목격한 비리 행위를 알려온 또 다른 작가들입니다. 제보자들은 하나 같이 제보 사실이 드러나면 미술계로부터 매도당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미술계 개혁을 위해 누군가는 용기를 내야 한다’면서 취재진에게 입을 열었습니다. 이번 리포트는 이런 분들의 제보가 없었다면 보도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미술계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뉴스를 보고 분노하신 여러분들도 미술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사회
이유경
[탐정M] "미술계의 비밀 '부모 찬스'를 고발합니다"
[탐정M] "미술계의 비밀 '부모 찬스'를 고발합니다"
입력 2020-10-12 15:57 |
수정 2020-10-1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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