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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자이미지 전준홍

[알고보니] '새 생명 주셔서 고맙다'는 편지 받으면‥어떨까

[알고보니] '새 생명 주셔서 고맙다'는 편지 받으면‥어떨까
입력 2021-11-12 10:05 | 수정 2021-11-1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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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보니] '새 생명 주셔서 고맙다'는 편지 받으면‥어떨까
    지난달 말 6살 소율양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투병생활을 이어온지 2년 만에, 먼저 세상을 뜬 엄마의 품에 안겼습니다. 소율양은 심장과 좌·우 신장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짧게 세상에 있다 갔지만 소율양의 몸의 일부는 누군가의 몸속에서 여전히 살아서 자라고 있습니다. 아버지 전기섭씨가 장기기증을 결심한 이유입니다.

    -전기섭/소율양 아버지
    "제가 소율이 장기기증을 결정한 이유도‥ 소율이 심장이 멎어서 화장을 하게 되면 한줌 잿더미로 밖에 변하는게 안 되잖아요. 대신에 기증을 하게 되면 그 아이가 건강하다고 다시 살아나면 소율이 심장도 뛰고 죽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으려고 기증을 결정한 거였거든요."

    [알고보니] '새 생명 주셔서 고맙다'는 편지 받으면‥어떨까
    장기기증자 비밀유지는 보편적 원칙

    하지만 답답함도 있습니다. 소율이의 심장이 어찌됐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기섭씨만이 겪는 일이 아닙니다. 현행법상 기증자와 수혜자의 신상은 비밀에 부쳐집니다. 장기 밀매나, 장기기증을 빌미로 금전을 요구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저 어딘가에서 소중한 이의 몸의 일부분이 잘 지내고 있을 거란 기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규정이 아닙니다. 세계보건기구, WHO도 이러한 '비밀유지’ 의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따르는 보편적인 원칙입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장기밀매에 악용되거나 금전적 거래가 오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알고보니] '새 생명 주셔서 고맙다'는 편지 받으면‥어떨까

    '장기기증 비밀유지' WHO 지침

    해외에선 기증자-수혜자 간접 교류 허용

    하지만 상당수 나라들이 장기 기증자와 수혜자의 '간접’ 교류는 보장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장기이식관련 기관은 비밀은 철저히 지키면서 익명 편지 교환을 중개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중개가 아니라 편지 내용도 검수합니다. 행여 금전적인 요구를 하는 등의 불미스러운 경우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기증자와 수혜자의 나이와 성별, 이식 후 건강상태에 대한 정보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간접교류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서로 동의를 거쳐야 합니다.
    [알고보니] '새 생명 주셔서 고맙다'는 편지 받으면‥어떨까

    미국장기조달 및 이식 네트워크(OPTN) 지침

    호주도 장기기증 기관을 통해 익명으로 편지를 교환할 수 있습니다. 또 이식된 장기에 대한 정보와 이식을 받은 사람의 건강상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일본도 이식 후에 익명 편지를 교환할 수 있습니다.
    [알고보니] '새 생명 주셔서 고맙다'는 편지 받으면‥어떨까

    일본 장기이식네트워크(JOTNW) 지침

    이탈리아의 경우도 기관의 중개를 통해 편지 교환이 가능합니다. 기증자 가족은 이식 뒤 10년 이후까지 수혜자의 건강상태에 대한 정보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식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상호 동의를 거쳐 직접 교류가 가능해지는 관련법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기증자와 수혜자의 정보가 공개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범죄수사나, 당사자의 동의를 거쳐 장기기증 홍보사업을 하는 등 공익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경우입니다. (장기기증법 제31조) 하지만 일상적인 간접 교류는 아직까지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 "장기기증자 배려‧예우"

    편지를 교환하는 것이 유족들에게 무조건 도움이 되는건 아니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차라리 차라리 모르는게 낫다는 겁니다. 장기 이식이 100%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잊고 사는게 일상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제외한 많은 나라들이 익명 편지를 허용하는 이유는 그 안에 깃든 철학, 즉 기증자와 기증자 가족에 대한 배려와 예우 때문입니다.

    올해 3월 국민권익위원회의 '장기기증 실효성 제고방안’ 보고서를 통해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국민 1천 9백여 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뇌사후 장기 기증자 가족에 예우방안 중 가장 많이 생겼으면 하는 것은 장례지원서비스(52.5%)였습니다. 사망 하나만으로도 힘든데, 장기기증까지 하는 복잡한 상황에서 장례식 절차 도움을 받고 싶다는 의견인 것입니다. 현재는 법적으로 최대 360만원 한도 내에서 '사후적으로’ 실비 지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원하는 것은 추모공원 설립(24%)이었고, 그 다음이 유가족 정서적 지원(13.7%)이었습니다. 일회적인 현금성 지원보다는 유가족과 기증자에 대한 배려와 예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뇌사후기증 감소‥ 소율아빠 "편지에 기대"

    우리나라의 뇌사 후 장기기증은 늘지 않고 해가 갈수록 오히려 줄고 있습니다. 뇌사 기증자는 2016년 573명에서 2020년엔 478명으로 감소했습니다. 장기기증을 꺼리는 이유는 신체훼손에 대한 거부감(32%), 막연한 두려움(30.8%), 정보부족(15.9%) (보건복지부 자료) 때문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그결과 우리나라 뇌사 기증자 수는 인구 백만명당 8.7명으로 스페인 48.9명, 미국 36.9명, 영국 24.9명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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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사후 기증자 비율 선진국에 크게 못 미쳐

    물론 편지 교환이 장기기증을 늘린다는 어떤 보장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증자의 입장을 헤아려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첫 단추가 될 수 있습니다. 소율이 아버지 전기섭씨가 <알고보니>팀과 나눈 대화에 그 단초가 있습니다.

    -전기섭/소율양 아버지
    "편지 교환은 추진중이니까, 그게 성사되면 편지 교환을 할 수 있게끔 해주겠다고 그런식으로 말씀을 해주셔서 제가 기증을 선택한 부분도 있거든요."


    (어떤 내용의 편지를 주고 받고 싶으세요?)

    "안부가 가장 중요한 거죠. 잘 지내고 있냐. 건강하게. 그게 가장 궁금하죠. 고맙다는 얘기를 해서 보내주면, 저는 잘 지내면 된다, 건강하게 잘 지내면 된다고 말 하고 싶어요."

    법안은 계류중‥"유권해석으로 시범실시"

    편지 교류를 비롯해 기증자와 기증자 유족에 대한 예우를 강화하는 장기기증법은 국회에 계류중입니다. 아직 법이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관계자는 "익명 편지 교환을 장기기증 홍보를 위한 '공익적 목적’에 부합하는 경우로 유권해석을 내려서, 관련 시스템을 개발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유가족 예우를 의무화하는 법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행되는 일종의 시범 사업 성격에 가깝습니다.

    이따금 해외 언론에서는 기증자와 수혜자간 주고받은 편지가 공개되어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캐나다 언론에 소개된 편지를 번역해 소개합니다. 내용을 보면 기증자와 수혜자 모두 편지를 매개로 '치유’를 받고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당사자의 진정성 있는 "고맙다"는 말은 기증자 가족들에겐 큰 위로이자, 장기기증을 고민하는 이들에겐 큰 용기를 주는 말일 수 있습니다.
    [알고보니] '새 생명 주셔서 고맙다'는 편지 받으면‥어떨까

    장기기증 수혜자가 기증자에게 보낸 편지(출처: National Post)

    친애하는 기증자 가족 여러분,



    현충일(매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일)이 다가옴에 따라 우리는 멈춰 서서 우리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저는 자신의 삶을 희생한 뒤 제 삶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신 기증자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세상엔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그저 "고마워요"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압니다.



    당신의 관대한 선물, 즉 "삶이라는 선물"을 통해 당신은 제게 놀라운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평생 이런 치료를 기다려왔습니다. 저는 병을 가지고 태어났고 평생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을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다른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어떤 운동도 할 수 없었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걷기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식을 받은 이후로 놓쳤던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운동을 즐길 거라 생각도 못했지만, 운동을 하고 있고 정말 즐기고 있습니다.



    당신의 관대한 선물 덕분에 이제 희망에 찬 기분으로 제 꿈을 이뤄나갈 수 있습니다. 배우자와 저는 여행을 자주 다니며 세상을 볼 계획입니다. 최대한 인생을 즐기며 매일을 즐길 것입니다.



    다른 가족들도 마음을 열고 사랑하는 사람의 장기를 기증하고, 저와 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당신이 저에게 주신 삶이라는 선물에 영원토록 감사드립니다. 저는 당신의 가족이 지상에서 가장 용감한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만날 수 없을지라도,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제 마음 속에 있을 것입니다.



    – 장기 수혜자가 기증자 가족에게.


    ※ [알고보니]는 MBC뉴스의 팩트체크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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