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여성 배달원, 전기 자전거를 탄 이유
지난달 30일 저녁, 서울 고속터미널 사거리. 배달원 사망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저는 퇴근길에 사고 현장을 찾았습니다. 인도 위에 놓인 작은 화환 하나가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소주 병을 들고 찾아와 고인을 추모하는 동료 배달원들도 만났습니다. 아래는 당시 사고를 전한 첫 기사입니다.
[단신 기사] '반포역 인근서 전기 자전거·화물차 충돌‥40대 여성 숨져'
오늘 낮 12시 20분쯤, 서울 서초구 반포역 인근 교차로에서 5.8톤짜리 화물차와 전기자전거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경찰과 소방당국이 신고를 받고 출동했지만, 전기자전거 운전자인 40대 여성이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경찰은 인근 CCTV 등을 분석해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으며, 화물차 운전자가 음주운전을 한 정황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2022.3.30)
건조한 사건사고 기사에 드러나지 않았던 고인의 사연은 현장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동료들에 따르면 고인은 두 자녀를 홀로 키우는 49살 여성 A씨였습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올해 1월 처음 배달 일을 시작했는데, 서초구와 강남구 골목 일대를 돌며 하루에 7만 보 이상 걸었다고 합니다.
매일 녹초가 되도록 일했지만 손에 쥐는 돈은 세 가족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고인은 배달을 더 해볼 생각으로 궁리 끝에 면허 없이도 탈 수 있는 전기자전거를 마련했습니다. 2월에는 한동안 배달도 줄여가며 전기자전거를 타는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전기자전거로 배달을 시작한 건 3월. 그런데 한 달도 안 돼 참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한순간 어머니를 잃은 두 자녀는 충격에 빠져 한동안 대화 조차 어려웠다고 동료 배달원들은 전했습니다. 5.8톤 화물차와 전기자전거‥그날 도로에선
자전거와 전기자전거는 도로교통법상 '차'로 분류됩니다. 자전거도로가 따로 설치돼 있지 않은 곳에선 가장 우측 차로에서 주행해야 합니다.
유가족이 '경찰에서 파악한 사고 당시 정황'이라며 전해준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시 고인이 탄 전기자전거와 화물차는 고속터미널 사거리 부근에서 정지신호를 받고 가장 우측 차로인 4차로에서 나란히 대기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직진 신호로 바뀌자 구반포에서 논현동 방향으로 움직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경찰 관계자도 MBC 취재진에게 "고인이 탄 전기자전거와 화물차가 같은 방향에 있었고, 같이 움직이다 사고가 났다"고 말했습니다.구체적인 사고 경위는 경찰이 조사 중이니 곧 밝혀지겠지만, 현장에서 제가 주목한 건 따로 있었습니다. 도로에 나선 자전거 운전자들이 느끼는 부담감이었습니다.
도로교통공단 서울지부 정의석 교수는 "자전거는 도로에서 차로 분류되기 때문에, 차량이 추월할 때는 가능한 차로를 이동해서 자전거를 피해야 하고, 자전거와 자동차 운전자 모두 서로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는 어떨까요. 저도 공유자전거 '따릉이'를 타고 직접 도로를 달려봤습니다. 규정에 맞춰 가장 우측 차로로 달렸는데, 제 뒤에서 오던 차량들이 차선을 바꾸지 않고, 제 왼쪽으로 '쌩쌩' 지나갔습니다. 제 옆으로 다가오는 차량을 피하려고 인도 쪽으로 바짝 붙다보니 수시로 배수구 같은 장애물이 나타났고, 균형을 잃고 기우뚱하는 등 위험한 순간도 적지 않았습니다.
덩치가 큰 화물차가 제 곁을 지날 때는 저도 모르게 위압감을 느끼며 결국 인도로 올라와야 했습니다. 법은 자전거를 '차'로 간주하지만, 제가 탄 자전거는 '차'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속 60km 미만인 도시지역의 일반 도로 폭은 3미터입니다. 화물차와 전기자전거가 같은 차로에서 나란히 달린다고 하면 도로폭은 충분할까요?
통상 화물차량 폭은 2,420 ~ 2,495mm이고, 전기자전거의 폭도 보통 530~540mm입니다. 둘을 더하면 최소폭은 2,950mm, 최대폭은 3,035mm입니다. 화물차와 전기자전거가 폭 3m 짜리 1개 차로 위에서 같이 이동하기엔 충분치 않은 공간입니다.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겁니다.
자전거 전용도로와 횡단보도가 따로 없던 이번 사고 장소는 평소 오토바이 또는 전기자전거로 배달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운행시 주의해야 하는 구간 중 하나로 꼽힙니다. 차량과 자전거 운전자가 서로를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배달을 부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도로 위 자전거 운전자도 늘고 있습니다. 결국, 도로를 이용하는 모두가 함께 조심해야 사고를 막을 수 있습니다.
배달원 산재 적용, 왜 어렵나‥핵심은 '전속성'
현행 산재보험법은 보험설계사, 골프장 캐디, 택배기사 등 14개 직종 특수고용노동자도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는 아니지만, 근로자성이 있다고 보고 특수고용노동자를 위한 산재보험 특례규정을 정해놓은 겁니다. 퀵서비스기사나 택배기사 등 배달노동자도 원칙적으론 의무 가입 대상입니다.
이번 사고로 숨진 A씨도 배달의민족과 쿠팡이츠에서 일감을 받아 배달해 왔고, 원칙적으론 산재보험 가입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산재 적용은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왜일까요?
문제는, 여러 업체에서 동시에 일감을 받는 '플랫폼' 배달 노동자가 산재보험을 적용받기 위한 '전속성' 조건을 맞추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산재보험법 제125조에 따라, 2022년 기준 하나의 사업장에 속해 한 달에 115만 원 이상의 보수를 받거나, 93시간 이상 일해야 이른바 '전속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A씨가 두 업체에서 각각 매달 50~60만 원 정도를 벌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한 사업장에서 발생한 보수 성격의 수수료가 115만 원을 넘지 않아 '전속성' 기준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산재보험료를 내더라도 산재 처리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이 때문에 전속성 폐지를 골자로 하는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아직 통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배달노동자들은 어제(1일) 기자회견을 열고 "전속성 폐지 개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위에서조차 한 번도 논의가 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국회에서 하루 빨리 개정안을 처리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유가족 후원하고 싶다"‥기자에게 온 메일
기사가 나가자 안타깝다며 유가족을 후원하고 싶다는 메일이 왔습니다. 메일을 보내주신 분들의 동의를 얻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경기도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다는 김 모 원장님은 "기사를 보고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며 "두 자녀분들에게 액수는 작아도 정기 후원을 하고 싶다"고 전해왔습니다.
또 다른 직장인도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하루 7만보 이상을 걸었다는 기사를 보고 무척 마음이 아팠다"며 "두 자녀분들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받은 첫 월급 350만 원을 익명으로 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습니다. 취재진은 고인의 빈소를 찾아가 유가족에게 이분들의 뜻을 전해 드렸습니다.
3월에만 4번의 배달 노동자 사망 사고가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안타까운 비극이 반복돼야 할까요. 고용노동부와 국회, 경찰은 물론이고, 오늘도 바삐 도로 위를 달리는 배달 노동자들과 그들과 도로를 공유하는 차량 운전자들, 수십만 배달원을 사실상 고용한 배달 플랫폼까지 또 다른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취재: 김상훈 sh@mbc.co.kr · 김민형 peanut@mbc.co.kr / 영상취재: 이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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