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수요 시위' 주변은 늘 어수선합니다. 인근에서 극우단체들이 맞불 집회를 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소녀상을 조롱하고 시위 참가자들에게 욕설과 막말을 퍼붓고 있습니다. 소녀상 주변을 집회 장소로 선점해, 정작 '수요 시위'는 위안부 피해 상징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3년 전부터 이랬다고 합니다.
참다못한 정의기억연대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습니다. 무슨 조치든 좀 해달라는 호소였습니다. 그게 지난해 1월이었는데요. 인권위는 무려 1년 8개월 만인 지난달 1일, 이 진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기각'이란 겁니다. 참고로 진정이 받아들여질 땐 '인용'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 달여가 흐른 지난 8일, 이 결정을 두고 서로 다른 내용의 보도자료 두 개가 발송됐습니다. 하나는 인권위 조사총괄과가 홍보실을 통해 배포했고, 다른 하나는 김용원 인권위 상임위원이 자신의 정책비서관을 시켜 돌린 자료였습니다. 두 자료의 결론은 같습니다. "인권위 침해구제제1위원회가 정의기억연대의 진정 사건을 심의했고, 기각 결정을 선언했다"는 겁니다.
침해구제제1위원회 위원장인 김용원 위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위원회를 구성하는 3명의 위원 중 2명이 기각을 주장했고, 단 한 명이 인용을 주장해 기각이 결정됐다"고 설명했습니다. 다수결이란 겁니다. 그러면서 "서로 상충하는 집회 중 특정 집회를 국가가 우선 보호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특정 집회에 반대하는 집회를 사전에 억제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기각 이유를 덧붙였습니다.
인권위 조사총괄과는 "법적 근거가 없는 기각 선언"이었다며 반박에 나섰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제13조제2항
'소위원회 회의는 구성위원 3명 이상의 출석과 3명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위 조항을 근거로 든 조사총괄과는 "설립 이후 현재까지 진정의 인용뿐 아니라 기각 등으로 의결할 때도 이 의결 규정을 따른다고 해석하고 위원회를 운영해왔다"고 지적했습니다. 한마디로 '만장일치'여야 무슨 결론이든 낼 수 있다는 건데요. 따라서 3명이 아닌 2명의 의견만으로 기각 결정을 선언한 건 인권위법에 어긋난다는 겁니다.
조사총괄과는 또 침해구제제1위원회에서 인용을 주장했던 나머지 위원 한 명과 사무처가 재논의를 추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김용원 위원장이 명시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라는데요. '해당 진정을 기각 처리하지 않으면 다른 95건에 대한 후속 절차 진행과 침해구제제1위원장으로서의 직무를 거부하겠다'는 말까지 해, 다른 사건 처리를 위해 부득이 해당 진정을 기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조사총괄과의 해명입니다.
이런 식의 일 처리도 가능한 건지, 또 인권위법 제13조 제2항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지는데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김용원 상임위원에게 직접 물어봤습니다.
김 상임위원은 국회에서의 법안 의결을 예시로 들었습니다.
"국회법에도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과반수의 의결을 하는 게 의결정족수로 규정돼 있어요. 법안이 올라왔을 때 '제정 찬성 의결합니다, 손 드세요' 해서 과반이 안 되면 부결하고 끝나잖아요. 그런데 인권위에서 주장하는 식으로 하면 말입니다. '자 찬성 부결됐으니 이번에는 제정 반대를 의결하겠습니다, 손 드세요' 이렇게 다시 해야 돼요.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 방식입니까. 진정을 인용하는 안건을 상정했는데 그게 부결되면 그건 기각인 거죠." (김용원 상임위원과 통화 중)
반면 인권위 내부 관계자는 "국회 의결과 동일 선상에 두고 비교해선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국가기관이나 지자체, 법인, 단체 등으로부터 인권을 침해당했다며 피해자가 제기한 진정을 '기각'할 땐 그 진정을 '인용'할 때만큼이나 충분한 논의와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인권위법 제39조가 기각의 사유를 세 가지로 정확히 구분해 둔 이유도 그 맥락"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김용원 상임위원의 주장대로라면, 인권위에 제기된 진정이나 구제 신청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마저 커지는데요. 김 상임위원 역시 "진정 '인용'이 어려운 것은 맞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 "국가기관의 인권 침해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권고하는 행위를 남발해선 안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는데, 그 뒤에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진보성향의 위원들은 뭐든지 인권을 우선으로 하는 입장에서 진정 인용이 많으면 좋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죠." (김용원 상임위원과 통화 중)
◇ "진영 논리가 투영된 인권위"‥초유의 이념 대리전?
'국가 인권의 중추 기관에서 웬 진보 보수?' 싶지만 인권위 지도부 구성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현 인권위 지도부는 송두환 인권위원장과 3명의 상임위원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여기서 송 위원장과 남규선 상임위원은 문재인 정부 때부터 재임했고, 김용원 상임위원과 이충상 상임위원은 현 윤석열 정부가 임명했습니다. 사실상 현 정권과 전 정권 인사의 2:2 구조인 겁니다.
김용원 상임위원이 송두환 위원장을 비롯한 기존 인사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표면적 이유는 '인권위법 해석의 차이'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이 발효되고 위원회가 출범한 건 22년 전인 지난 2001년. 인권위 출범 초기부터 자리를 지킨 내부 관계자들은 "그간 이런 내홍이 전무했던 건 합의제 기관으로서 인권위가 구축해 온 역사와 전통 덕분"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인권 보호'라는 대의 아래 구성원 간 토론과 숙의를 거쳐 합의에 도달해 온 그간의 역사와 전통이 있었기에 위원회가 제 역할을 해 올 수 있던 겁니다. 이런 상황은 처음 겪는 일입니다." (인권위 내부 관계자)
하지만 현 정부에서 임명된 위원들이 최근 법 조항과 규정에 천착하며 그동안의 운영 방식과 관례에 반발하다 보니 예기치 못한 의견 충돌이 이어진다는 겁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의 '이념 전쟁' 선포로 여러 현안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 입장 차가 큰 요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문제를 두고도 진영 대리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개탄 섞인 분석도 나옵니다.
"진보 성향의 사람들은 인권지상주의적인..그런 사고 방식을 가졌죠. 진영 논리가 보수 쪽에서 작동한다고 그렇게 봐서는 안 되고, 진보진영의 논리가 인권위에 굉장히 투영돼 있는 거예요." (김용원 상임위원과 통화 중)◇ '인권'에서 멀어지는 '인권위'
"뭔 얘기가 많아! 군인권보호관 똑바로 해 이 사람아!..법적으로만 하면 우리가 왜 여기 있습니까! 국가인권위원회 왜 있어요 법원으로 갔지!" (9월 11일 국가인권위원회 전원위원회 중)
지난 11일, 군 사망사고 유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인권위 전원위원회. 유족들과 인권위원 사이 고성이 오가면서 금세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지난달, 군인권보호관이기도 한 김용원 상임위원은 고 채수근 상병 사건을 수사하던 박정훈 대령에 대한 긴급구제 안건 처리를 위해 송 위원장이 소집한 상임위원회에 불참했습니다. 그러고는 본인 소관의 군인권보호위원회를 열어 안건을 기각했습니다.
"국가인권위 군인권보호관이..외압(으로부터) 지켜주고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게끔 해줘야 하는 게..김용원 씨란 말이야..그 사람들이 보호해줘야.." (고 이예람 중사 아버지 인터뷰 중)
인권 문제를 '진영 논리'로 풀어낸다는 것, 인권위 내부에서 가장 많은 우려가 터져 나오는 대목입니다.
인권위가 출범한 배경과 취지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인권 침해를 호소하며 구제를 요청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구제책을 고민해줬으면 하는 게 인권위원들에 대한 국민의 기대일 텐데요.
때아닌 이념 대리전이 '인권 보호와 피해자 구제'라는 인권위의 정체성과 얼마나 어울리는 모습인지, 뒷맛이 개운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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