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하교하자 입구에 흰 천막이 세워집니다.
1년 전 7월 18일 순직한 서이초 교사를 추모하기 위해섭니다.
궂은 날씨에도 퇴근 후 서이초를 찾은 동료 교사와 시민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졌고, 추모객들은 2년차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인이 생전 학부모의 민원과 문제 학생 지도로 힘들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고인의 죽음을 계기로 악성 민원으로 고통받던 교사들의 목소리도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주말마다 거리에 모여 고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달라는 교사들의 끊임없는 외침에 정부는 지난해 8월 교사의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이른바 '교권보호 5법'을 마련한겁니다.
[교권보호 5법]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안: 교원의 정당한 교육활동은 아동학대로 보지 않음, 교원이 아동학대로 신고됐을 경우 수사기관의 교육감 의견 참고 의무화 등
·교원지위법 개정안: 교사가 아동학대로 신고되더라도 정당한 사유 없이 직위해제 처분 불가 등
·초중등교육법 개정안: 학교장에게 민원 처리 의무 부과, 교원 개인정보 보호 등
·유아교육법 개정안: 유치원 원장에게 민원처리 책임 부여, 교원 개인정보 보호 등
·교육기본법 개정안: 학생의 보호자가 교육을 위해 교원과 학교에 협조하고 존중해야 할 의무 부과
■ 교권보호 5법 개정에도‥"아직 달라지지 않아 비참한 마음"
교권보호 5법 시행 이후 교육 현장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분명 변화는 있었습니다.
교사가 아동학대 혐의로 조사나 수사를 받게 될 경우 교육감이 수사 기관에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한 이후 교사의 불기소 비율은 이전보다 17.9% 증가했습니다.
교사를 상대로 한 아동학대 신고 건이 실제 재판까지 가는 경우가 적어졌다는 뜻입니다.
또, 교육 당국이 교사의 교육활동 침해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보호자가 교육활동을 침해해도 아무런 조치를 내리지 않은 경우가 지난해에는 전체의 절반 정도였다면, 올해 1학기 동안에는 10건 중 1건에 불과했습니다.
교육청이 교육활동 침해 보호자를 고발하거나 고소한 경우도 늘어서, 2022년 4건, 2023년에는 11건이었지만 올해는 상반기에만 12건으로 집계됐습니다.
하지만 현장 교사들이 느끼는 변화의 체감도는 여전히 낮습니다.
지난달 서울 교사 1천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한 설문조사에서 '서이초 사건 이후 교권 상황이 나아졌다'고 답한 교사는 10%에 불과했습니다.
84%는 교권보호 5법 개정 이후에도 '현장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지난 18일 서이초 추모 공간을 찾은 5년 차 초등교사 한다은씨도 저희 취재진에게 "다 함께 소리를 내고자 했지만, 아직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너무 비참한 마음"이라고 전했는데요.
현장 교사들은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취재진이 교사들을 만나봤습니다.
■ 학생 제압은 커녕 본인 방어도 어려워
올해로 교직 생활 36년 차인 정 모 교사는 지난 4월 말 동급생을 때리던 학생을 말리다 가해 학생에게 멱살을 잡히고 폭행당했습니다.정 씨는 사건 이후 어지럼증과 인지 능력 저하 등 후유증에 시달렸고, 두 달 뒤 학교에서 쓰러졌습니다.
검사 결과는 '만성 경막하 출혈', 폭행 당시 충격으로 뇌출혈이 생겨 머리 안에 피가 고인 겁니다.결국 수술을 받아야했고, 내년 2월 정년 퇴직을 앞두고 있었지만 회복을 위해 더는 교단에 설 수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정 씨는 당시 학생을 제압할 수도, 자신을 지킬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 "아동학대 신고될까"‥손발 묶인 교사들
교권 침해는 지난 2020년부터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백승아 의원실이 교육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교권 침해 사안을 심의하는 '교권보호위원회(교보위)'는 총 5천 50건으로, 2020년 1천 197건에 비해 4배 넘게 늘었습니다.
특히, 이 가운데 교사가 상해나 폭행 피해를 입은 경우도 10건 중 1건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폭행 피해에도 정 씨를 비롯한 교사들이 정당방위조차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아동학대로 고발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지난 6월 서울 교사 1천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설문조사에서는 교사들의 56.2%가 교육활동 보호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무고성 아동학대 신고를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꼽았습니다. 특히 '정서적 아동학대'는 구체화된 기준없이 모호하게 규정돼 있어 일부 학부모들에게 악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교사의 생활 지도를 두고 '아이를 미워한다'며 정서적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하는 겁니다.
인천 강화의 한 중학교 교사는 지난 1월 자신의 학급 반장의 학부모에게 아동학대로 고소당했습니다.
반장인 자신의 아이에게 학년 말에 모범상을 주지 않았고, 수업태도 개선을 위해 주의를 준 것 등이 아이에게 상처를 준 학대 행위라고 주장한겁니다.
또 이 학부모는 '선생님이 평소에 친구를 미워했다'는 내용의 학생 친구들의 녹취를 경찰에 증거로 제출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 학부모가 내용을 쓰고 아이들에게 읽게 한 거짓 증거로 밝혀졌습니다.
피해교사는 "생활 지도를 하면 아동학대가 되니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20년 넘게 교직에 있었지만, 지금은 "인권도 없고, 교육권도 없다"며 "학교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탄식했습니다.
이렇게 교사들은 쉽게 고소를 당할 수 있는 반면에 방어권을 행사하는건 쉽지 않습니다.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증거를 수집하거나 증인을 찾는게 어렵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오산의 한 중학교 교사 이 모씨는 '학생의 생활 지도가 필요하다'고 학부모에게 연락했다가 '우리 아이만 미워하는 것 아니냐, 서운하다'는 항의성 답변을 받았습니다.이 씨가 해명하기도 전에 학부모는 학교 전담 경찰에게 민원을 제기했고, 학교로 찾아와 "가만두지 않겠다"며 이 씨를 협박하고 아동학대 혐의로 신고했습니다.
이 씨는 '아이를 미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학생들에게 증언을 받으려 했지만, 미성년자이다보니 학부모의 동의를 일일히 구해야 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다행히 경기도 교육청이 해당 사안에 대해 조사에 나섰고, 학부모를 협박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인해 이 씨에게 생긴 교직에 대한 회의와 상처, 불신과 불안감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요.
"아침마다 좋은 이야기 해주려고 매번 기사를 찾아서 하루 시작을 준비했고, 아이들 배고플까봐 슈퍼에 가서 간식을 챙겼어요. 힘들다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학부모와 이야기하느라 매일 늦게 퇴근하기도 했습니다."
"단지 교육 활동을 할 뿐이잖아요. 이걸로 제 인생을 무너뜨리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는 건 진짜 이해가 안 되죠. 이제 지도를 해야 하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왜냐 지도를 잘못하면 아동학대인데요." - 경기 오산 이 모 교사
■ 남아있는 과제들
'교권보호 5법'을 보완해달라는 교사들의 호소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 백승아 의원 등 국회 교육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은 '정서적 아동학대'의 범위를 명확히 하고, 긴급 상황 시 교사가 학생을 물리적으로 제지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서이초 특별법'을 발의했습니다.
백 의원은 "교사들이 아동학대 신고가 두려워 교권 침해 상황에도 무방비하게 '견디고 말지' 식으로 넘기는 실정"이라며 "그래서 교사의 생활 지도를 아동학대로 신고하지 않도록 교사들을 보호하는 법안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아동복지법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역시 체험학습에서 사고 발생시 교사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을때는 법적 책임을 면제해주는 등의 교권 보호를 위한 3가지 추가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도 조 교육감이 제안한 3법 제·개정 안뿐 아니라 교원 순직인정제도 개선과 민원을 직접 받지 않는 시스템 구축 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서이초 교사 순직 이후 1년, 교사들은 홀로 어려움을 감당하는 외롭고 고단한 일상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교사들이 생활지도도, 체험학습도 최대한 소극적으로 하며 학생들과 거리를 두는 현 상황은 결코 이상적인 교육의 방향은 아닐겁니다.
서이초 추모 공간에서 만난 3년 차 초등 교사 이재웅 씨는 저희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같이 선생님 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럴 자신이 없다는 게 많이 슬프고요."
재웅 씨를 비롯한 교사들의 좌절이 더는 반복되지 않으려면, 현장의 요구를 반영한 실효성 있는 법 개정과 함께 학교와 교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신뢰와 존중도 회복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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