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다" 인권위 사무총장 2년 9개월 만에 퇴임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처를 이끌어온 박진 사무총장이 사임했습니다.
지난 2022년 1월 취임한 지 약 2년 9개월 만입니다.
박 총장은 지난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부끄럽고 참혹해 얼굴을 들 수 없다"며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는 나는 퇴장한다"고 적었습니다.
그동안 인권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거꾸로 가는 인권위' 배경은?
"인권위원회에 가면 인권이 있다는 말을 다시 듣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론적으로 실패했다"
박 총장은 퇴임식에서 지난 2022년 취임 당시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인권위의 권고율은 창립 후 최저이고, 진정 건수는 지난해 대비 1천 건을 밑돌며, 결정례는 뒤집히고 있다는 겁니다.
인권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건, 위원들의 설전 끝에 각종 위원회가 사실상 파행 상태로 빠졌기 때문입니다.
'회의 파행'에 '전원위 보이콧'까지
인권위의 회의가 파행되기 시작한 건 지난해 4월 무렵부터 입니다.
당시 열린 ‘2023년 제13차 상임위’에서 김용원·이충상 상임위원은 화물연대 파업으로 공론화가 시작된 '업무개시명령'에 대한 안건을 두고 이견을 보이다 퇴장했습니다.
이후 두 위원은 위원 간 의견이 부딪혔을 때 퇴장하길 반복했고, 지난해 8월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의 긴급구제 안건에 불참한 뒤엔, 각각 '병가를 썼다' 거나 '예정된 출장이 있었다'고 해명했습니다.
특히 두 위원은 소위원회에서 만장일치에 이르지 못했을 경우, 전원위에 올릴 게 아니라 기각 또는 각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상정되지 않자, 지난 6월 일부 비상임위원과 함께 '전원위 보이콧'을 했습니다.
김용원·이충상 상임위원과 대립
인권활동가 출신인 박 총장은 윤석열 정부 들어 새로 임명된 김용원·이충상 상임위원과 줄곧 대립해왔습니다.
갈등은 회의 때마다 이어졌는데 김용원 상임위원 등은 박 사무총장을 퇴장시켜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거나 상임위원과 사무처 간부는 따로 앉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난 9월 안창호 신임 위원장이 취임한 후부터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두 위원의 의견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박 총장은 "사무총장은 위원장과 러닝메이트 개념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위원장은 새로운 사무총장과 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퇴임한다"고 밝혔습니다.
퇴임식 날 날아든 "만장일치 관행 폐기"
박 총장은 퇴임식 이후 MBC 취재진과 만나 '인권위의 앞날'에 대한 질문에 "걱정된다"고 답했습니다.
이어 "작년부터 굉장히 어려워졌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면서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인권위 직원들이 잘 헤쳐나갈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퇴임식 이후 같은 날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인권위 출범 이후 22년간 유지해 오던 소위원회 만장일치 합의 관행이 폐기됐습니다.
진정 사건들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아 사실상 인권위 의사결정 과정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목소리 내기 힘든 이들에게 힘 돼준 박 총장에 감사"
박 총장의 퇴임식에는 군인권센터와 성소수자부모모임 등 시민단체 인사들이 함께 했습니다.
정동렬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가는 "지난 시간 성소수자와 그 가족을 위해 보여주신 이해와 지지를 절대 잊을 수 없다"며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목소리 내기 힘든 이들을 위해 힘이 되어 준 총장의 배려에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2014년 선임병들의 가혹행위로 숨진 윤 일병의 어머니 안미자 씨는 "기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분노가 가득 차 있을 때도 있었는데 박 총장은 우리의 그 모든 것을 다 받아줬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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