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세계
기자이미지 전영우

[인싸M] '경계인' 로버트 레드퍼드‥그의 '아메리칸드림'과 우리의 미래

[인싸M] '경계인' 로버트 레드퍼드‥그의 '아메리칸드림'과 우리의 미래
입력 2025-10-02 08:58 | 수정 2025-10-02 09:34
재생목록
    [인싸M] '경계인' 로버트 레드퍼드‥그의 '아메리칸드림'과 우리의 미래

    1969년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선댄스 키드 역할을 했던 로버트 레드퍼드 [Lawrence Schiller]

    지난 17일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배우 로버트 레드퍼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젊은 세대는 그를 '어벤저스: 윈터 솔져'에 나오는 알렉산더 국장 정도로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좀 더 나이 든 사람들은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의 '선댄스 키드'나, '스팅(Sting)'의 사기꾼 조니 후커 같은 '미국형 반영웅(反英雄·Anti-Hero)', 또는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추억(The Way We Were)'의 낭만적이고 잘생긴 남자 주인공으로 더 많이 기억할 것입니다.

    '로버트 레드퍼드' 하면 일단 금발의 멋진 모습이 먼저 떠오릅니다. 지적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반항적인 느낌도 그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에서 보여준 '어두운 아메리칸드림(Dirty American Dream)'의 구현자, '코드네임 콘돌(Three Days of the Condor)', '스파이 게임(Spy Game)'에서 연기한 첩보기관원 역할도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져 있습니다.
    [인싸M] '경계인' 로버트 레드퍼드‥그의 '아메리칸드림'과 우리의 미래

    로버트 레드퍼드가 지난 198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뒤 다른 수상자들과 함께 웃고 있습니다. [AP]

    '선댄스 키드'가 만든 '선댄스영화제'

    로버트 레드퍼드는 배우뿐 아니라 영화감독과 제작자로서도 성공을 거뒀습니다. 1981년에는 '보통 사람들(Ordinary People)'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고, '퀴즈 쇼(Quiz Show)', '호스 위스퍼러(The Horse Whisperer)',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의 감독과 제작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하지만 '배우·감독·제작자' 로버트 레드퍼드보다 그가 영화계에 남긴 더 큰 발자취는 '선댄스영화제' 창립일 것입니다. 자신의 출세작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그가 연기한 '선댄스 키드'를 따라 이름 지은 이 영화제는 1980년대에 시작됐습니다. 저예산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주로 선보였는데, 스티븐 소더버그, 쿠엔틴 타란티노, 코엔 형제(자매) 등 유명 감독들이 영화제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러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아카데미협회는 지난 2002년 그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했습니다.
    [인싸M] '경계인' 로버트 레드퍼드‥그의 '아메리칸드림'과 우리의 미래

    인터뷰 도중 활짝 웃고 있는 로버트 레드퍼드 [SAGINDIE.ORG]

    그는 또 환경과 인권 운동에도 족적을 남겼습니다. 단적인 예로 지난 2012년에는 제주도 강정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국제적 연대를 호소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201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은 그에게 최고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했습니다.
    [인싸M] '경계인' 로버트 레드퍼드‥그의 '아메리칸드림'과 우리의 미래

    어린 시절 어머니 마사 레드퍼드와 함께 찍은 사진 [Vintage America Uncovered_페이스북]

    로버트 레드퍼드의 '아메리칸드림'

    로버트 레드퍼드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삶이 '지극히 미국적'이며, '아메리칸드림'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는 축구와 야구 등 운동도 잘하고, 지역 전문대(Junor College)에서 성적도 좋은 젊은이였습니다. 책을 많이 읽은 덕분이었는지 글재주도 좋아서 교내 스포츠 잡지의 기자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레드퍼드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말을 심하게 더듬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다른 문제는 로버트 레드퍼드가 태어난 1936년, 대공황 시기여서 좋은 직업을 갖기 힘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레드퍼드는 전문대를 졸업해, 당시로선 나름대로 고학력자였지만 일자리가 없어 민주당 루스벨트 정부가 시행한 '공공 근로' 프로그램에서 한 달에 30달러를 받고 일했습니다. 캘리포니아주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일을 한 것 같습니다. 운 좋게 지역 증권거래소에서 회계 직원으로 채용됐지만 말을 심하게 더듬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그 뒤엔 우유 배달원으로 겨우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아버지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서 로버트 레드퍼드는 어린 시절, 하루에 1달러로 세 식구가 생활해야 할 정도로 풍족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인싸M] '경계인' 로버트 레드퍼드‥그의 '아메리칸드림'과 우리의 미래

    1954년 가을 콜로라도대학으로 떠나기 전 어머니 마사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로버트 레드퍼드 [Courtesy of Robert Redford]

    방황 끝에 다다른 '연기'의 길‥그가 본 세상

    그래서 로버트 레드퍼드는 히스패닉 이민자들이 주로 사는 가난한 동네에서 성장했습니다. 10대 시절에는 음주와 절도 행각을 벌이는 '문제 청소년'이기도 했습니다. 대학교 입학 직후에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학업을 그만두고 프랑스 등 유럽을 떠돌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를 그는 "마치 신(神)에게 버림받은 것 같았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만큼 절망이 컸던 것이지요. 화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연기(演技·Acting)', 즉 배우의 길이었습니다. 뉴욕 AADA(American Academy of Dramatic Arts)에서 연기를 배워 연극 무대와 TV 드라마로 진출했습니다. 그가 배우로서 성공한 데에는 연기력이 좋았기 때문이지만 그의 수려한 외모가 한몫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인싸M] '경계인' 로버트 레드퍼드‥그의 '아메리칸드림'과 우리의 미래

    로버트 레드퍼드가 1943년 아버지 찰리(오른쪽), 어머니 마사(왼쪽 뒤)와 텍사스주를 방문해 함께 찍은 사진 [Courtesy of Robert Redford]

    로버트 레드퍼드는 그 수려한 외모를 아버지에게 찰스 로버트 레드퍼드 시니어(Charle Robert Redford Sr.)로부터 물려받은 듯합니다. 로버트 레드퍼드의 원래 이름은 찰스 로버트 레드퍼드 주니어. 아버지와 같습니다. 그의 어머니인 마사 레드퍼드(Martha Woodruff Redford)가 남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답니다.

    그는 대공황시기인 1936년에 태어나 경제적 궁핍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간접적이지만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을 눈으로 본 세대의 한 명입니다. 또 미국이 가장 강성했던 1950년대와 '히피·인권혁명'으로 상징되는 1960년대, 경제 위기가 덮친 1970년대, 미국에서 '보수 혁명'이 위력을 떨치기 시작한 1980~90년대에 청·장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IT 혁명과 기후 변화에 대한 관심 등이 본격화된 시작된 2000년대 역시 목도했습니다.
    [인싸M] '경계인' 로버트 레드퍼드‥그의 '아메리칸드림'과 우리의 미래

    1994년 자신이 감독한 영화'퀴즈 쇼' 세트에서 촬영 중인 로버트 레드퍼드 [Photograph courtesy Everett]

    '아메리칸드림'과 '사회 환원' 전통‥레드퍼드, 카네기, 록펠러

    그는 성공한 영화인이자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비록 요즘 상업화됐다는 비판도 받고는 있지만 그가 주도한 '선댄스영화제'는 저예산 독립 영화와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힘든 다큐멘터리가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가 됐습니다. 이 영화제를 지키기 위해 그는 적지 않은 사재(私財)를 쏟아부었습니다. 많은 '아메리칸드림'의 주인공들처럼 그는 자신의 돈과 시간을 '공적(公的) 영역'으로 환원했습니다. 그가 맹렬히 비판했던 트럼프 대통령마저 "레드퍼드는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인싸M] '경계인' 로버트 레드퍼드‥그의 '아메리칸드림'과 우리의 미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만년 모습 [미국 국회도서관 소장 사진]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미국의 큰 부자들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기부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철강왕' 카네기와 '석유왕' 록펠러는 모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무자비한 경쟁을 통해 독점 자본가가 됐고 엄청난 규모의 부를 축적했습니다. 카네기의 'US 스틸'은 20세기 초반 미국 전체 강철 생산량의 65%를 차지했다고 하고,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는 한때 미국 석유 시장의 95%를 점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부도덕한 독점재벌의 표본'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카네기는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파업을 강제 해산시키다 10여 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한 1892년 '홈스테드 학살 사건'의 원인 제공자였습니다. 록펠러 역시 살인적인 노동력 착취와 저임금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전미 광산노조가 주도한 쟁의에 민병대를 투입해 40여 명을 숨지게 한 1913년 '러드로의 학살' 사건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인싸M] '경계인' 로버트 레드퍼드‥그의 '아메리칸드림'과 우리의 미래

    '석유왕' 존 D. 록펠러 [연합뉴스 자료 사진]

    하지만 이들은 만년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카네기는 1902년, 당시로선 천문학적 액수인 2천500만 달러를 기부해 워싱턴 카네기협회를 설립하고 공공 도서관 건립을 지원했습니다. 카네기회관, 카네기공과대학, 카네기교육진흥재단 등 교육·문화 분야에 3억 달러 이상을 기증했습니다. 그가 미국 전역에 지은 도서관만 2천500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록펠러는 1890~1892년 시카고대 설립을 위해 6000만 달러가량을 내놨습니다. 은퇴 후 사회사업에 총 3억 5000만 달러를 기부했다고 합니다. 1913년에는 록펠러재단을 세웠습니다. 록펠러재단은 기아와 인구 문제 대처, 대학 발전, 개발도상국 원조를 위해 지금까지 20억 달러에 이르는 금액을 전 세계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어져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등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큰 부자들은 거액의 기부 전통을 이었습니다. 계급·계층과 인종,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많은 재산을 내놨습니다.
    [인싸M] '경계인' 로버트 레드퍼드‥그의 '아메리칸드림'과 우리의 미래

    지난 2월 미국 메릴랜드주 옥슨힐에서 열린 '보수 정치 행동 콘퍼런스'에 참석한 일론 머스크(왼쪽)가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오른쪽)으로부터 전기톱을 건네받아 치켜들어 보이고 있습니다. [로이터·연합뉴스]

    '보편성'에서 '당파성'으로‥달라진 억만장자들

    그러나 요즘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억만장자들 가운데는 다른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이 이목을 끕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일론 머스크입니다. 머스크는 유럽의 극우를 지지하는 언행으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에는 한 독일 신문에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만이 "독일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올해 말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반이민' 극우 집회에서는 화상 연설을 통해 지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11만 명이 운집한 것으로 파악된 이 집회에는 프랑스와 독일, 덴마크의 극우 정치인들도 참석했습니다. 머스크와 함께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라고 불리는 억만장자 피터 틸과 데이비드 색스는 트럼프 대통령을 공개 지지해 눈길을 끕니다.

    물론 이들이 미국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할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21세기 IT 혁명에서 가장 커다란 부를 이룬 부자 가운데 꽤 커다란 상징성을 지닌다는 사실도 부인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특히 본인도 이민자이면서 '반이민' 집회에서 지지 연설을 하는 일론 머스크는, 미국이라는 사회가 겪고 있는 변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19~20세기의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카네기나 록펠러 등의 부자들이 자신들의 부와 영향력을 '보편성'에 투사(投射)했다면, 21세기 거부들은 '당파성'에 이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20세기 후반 이후 진행된 빈부 격차 확대와 전 세계적인 극우 집단의 영향력 강화, 정치 세력의 양극화 현상이 2차 대전 직전과 닮아 있다고 진단합니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다른 나라에 강변하는 대내외 정책을 펼치면서 '세계의 경찰' 역할을 포기했고, 이어서 세계 곳곳에서 터지고 있는 분쟁 역시 불안의 요소입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인싸M] '경계인' 로버트 레드퍼드‥그의 '아메리칸드림'과 우리의 미래

    만년의 로버트 레드퍼드 [AP]

    '경계인'의 죽음‥우리의 미래는?

    '20세기 영화인' 로버트 레드퍼드의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서부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랐지만 동부 뉴욕에서 배우가 되었습니다. 영화와 감독으로 성공했지만 다른 할리우드 스타들처럼 비버리힐즈의 대저택에 자리 잡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타의 산속이 그가 머물며 사색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는 성공할수록 그는 내적인 고독에 시달렸고, 더욱 가치 있는 것들을 추구하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할리우드와 유타주 산속, 아카데미 시상식과 선댄스영화제를 오가는 '경계인(Marginal Person)'이었습니다.

    자신의 분야인 영화계와 환경·인권을 위해 헌신한 이 '진보적 경계인'의 죽음은 어쩌면, 에릭 홉스봄이 얘기한 '장기(長期) 19세기'를 이어받은, (폴 존슨이 주창한) 1919년에 시작했다는 '현대 세계'의 종말을 준비해야 함을 시사하는 사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버트 레드퍼드 세대가 살았던 '세계'가 끝난 것이지요. 1·2차 대전을 통해 세계 최강국으로 성장한 뒤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했던 미국이라는, 이 커다란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영고성쇠가 '어쩌면 엄청난 변화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다가온 미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뉴스인사이트팀 전영우 논설위원》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인기 키워드

        취재플러스

              14F

                엠빅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