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 스크린 앞 곳곳에 사람들이 누워 있습니다. 마치 재해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의 수용시설을 연상시킵니다. 회의장 바닥에 종이상자를 깔고 누워 쪽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 누굴까요? 최근 경북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제, APEC 정상회의에 투입됐던 경찰관들입니다.
전국경찰직장협의회는 오늘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APEC 파견 경찰관의 열악한 근무 여건을 고발하는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어제 경찰청 앞에 이어, 국회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사진 사이에 놓인 작은 손팻말에는 "경찰을 노숙인으로 만든 경주 APEC"이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경찰직협이 공개한 사진에는 경찰관이 바닥에 박스를 깔고 쪽잠을 청하거나, 영화관 스크린 앞에 누워있는 모습 등이 적나라하게 담겼습니다. 영화관 복도 카펫 위에서 쉰 경찰들 중에는 먼지 때문에 목이 아프다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경찰관들에게 지급된 도시락 사진도 공개됐습니다. 밥과 김 가루, 간장을 뿌린 두부 등으로 구성된 단출한 식단이었습니다. 현장에 투입됐던 김경식 경찰직협 연대사업국장은 "식사를 보고 황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당연히 다른 반찬이 더 나올 줄 알았는데 정말 그게 끝이었다"면서 "처음엔 국도 없었는데 '식사가 왜 이러냐'고 항의하자 그제야 국이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식단 사진 옆에는 편의점에서 구입한 실제 도시락이 놓여 있었습니다. 경찰직협 관계자들은 "현장에서 제공된 식사가 1만 원짜리였다는데, 5천 원짜리 편의점 도시락보다 부실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사왔다"고 말했습니다.
제공된 숙소도 끔찍했다고 합니다. 일부 경찰관들은 화장실이 투명 유리로 돼 있는 이른바 '러브호텔'에서 자야 했습니다. 안유신 경찰직협 운영지원실장은 "모르는 경찰관과 함께 투숙할 때 사생활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고 전했습니다.
APEC 기간 경북 지역에는 하루 최대 1만 9천여 명이 경찰이 투입됐습니다. 이번 APEC 행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가운데, 현장 경찰관들은 "APEC이 성공한 건 묵묵히 일한 현장 경찰들을 쥐어짜 냈기 때문"이라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김 국장은 "30년 전 국가 행사에 투입됐을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면서 "우리는 OECD 선진국인데, 예산을 충분히 투입해 이런 부분은 제대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국무총리실은 어제 보도자료를 통해 "김 총리는 10월 15일 열린 APEC 치안·안전 관계 장관회의 준비 과정에서 파견 경찰관들의 처우 문제를 지적했지만, 당시 경찰청으로부터 '문제없이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애초 경찰청이 처우 문제가 없단 취지로 보고했다는 겁니다.
논란이 일자 경찰청도 입장을 냈습니다. 경찰청은 "현장 근무자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면서도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릴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경찰청은 "호텔, 리조트 중심의 보문단지 인프라로 인해 모든 경찰관이 대기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실내 공간 확보에 한계가 있었다"며 "대기 버스가 불편하다고 느낀 일부 경찰관이 지급된 담요나 박스를 깔고 휴게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식사 부실 지적에 대해서는 "시행 초기 일부 혼선과 혼잡, 배송 지연이 발생한 건 사실이나 현장지원팀 규모를 대폭 지원해 이후에는 특별한 문제 없이 식사가 이뤄졌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현장 불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배정민 경찰직협 청년국장은 "과연 현장 경찰관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총리가 언급하니까 마지못해 사과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대기 공간을 마련할 건지, 식사는 어떻게 할 건지, 세밀한 계획을 짜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경찰 내부망에는 "총리실이 개입해야만 하는 상황이 얼마나 한심한가" "사실상 총리에 허위 보고 한 건데 경찰청이 감사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대외적으로 창피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변화가 없다" 등 반응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직협이 공개한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며 시민들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명지대 행정학과 1학년 박서준 씨는 "뉴스 기사로만 소식을 접했는데 직접 사진을 보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면서 "일반 회사원도 출장 가서 이러면 힘들 것 같은데 하물며 경찰관이 이런 대우를 받는 건 너무하다고 했습니다.
경찰직협은 진정성 있는 사과와 전수조사 등을 요구하며 14일까지 사진전을 이어간다는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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