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내전 13년]
● 앵커: 캄보디아의 내전은 한마디로 수백만 명이 대량 학살되는 영화 킬링필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듯이 냉전체제와 국내정치세력간의 싸움으로 현대사에서는 최대 비극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23일 파리 평화협정 체결까지의 캄보디아의 내전 13년을 신창섭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 기자: 캄보디아의 비극은 지난 70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놀 장군이 우익쿠데타로 프랑스로 부터 독립해 중립주의를 내걸어 온 시아노프 정권을 뒤엎은 것이 그 발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소 냉전구도의 큰 배경과 뿌리 깊은 지역문제가 맞물림 해서 20년 이상 피의 대립이 지속됐습니다.
지난 75년에는 지역 패권주의에 기울은 중국을 등에 업은 크메르투즈군이 론놀 장군을 무너뜨린 뒤 민주캄보디아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크메르루즈는 시아노프를 배제하고 급격한 사회주의 정책을 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위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200만 명에 이르는 무고한 양민이 처형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크메르루즈의 급진적 정책은 이 지역을 통합해 인도지나 연방을 구상했던 베트남을 자극했습니다.
이어 78년 소련 을 등에 업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 점령해 괴뢰정권을 세운 뒤부터 친베트남계 정부군과 크메르주 그리고 시아노크 교우회 등 반정부 게릴라 간에 내전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또한 베트남이 세운 훈센정권의 타도를 위해 반정부 게릴라세력이 공동전선을 폈지만 각 정파 간의 깊은 불신과 알력은 사태해결을 더욱 어렵게 했습니다.
외세를 등에 업은 국내 정파 간의 대리전 양상을 띤 캄보디아 내전은 고르바초프 등장이후 미-소 냉전체제의 와해와 중-소화해 등 국제정세가 급변하면서 출구가 보이기 시작해 지난 10월 23일 평화협정 체결에 이르게 됐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정책과 킬링필드가 남긴 비극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MBC뉴스 신창섭입니다.
(신창섭 기자)
뉴스데스크
캄보디아 내전 13년[신창섭]
캄보디아 내전 13년[신창섭]
입력 1991-11-09 |
수정 199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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