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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김대중후보의 정치역정[신용진]

민주당 김대중후보의 정치역정[신용진]
입력 1992-12-19 | 수정 199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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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김대중후보의 정치역정]

    ● 앵커: 민주당의 김대중후보가 오늘 정계은퇴의 뜻을 밝힘에 따라서 지난 70년 이래 20여년을 풍미했던 양김 시대는 오늘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김영삼 당선자와 함께 반독재 투쟁에는 민주동지로 참여를 했고, 대권 고지에서는 숙명적으로 경쟁할 수 밖에 없었던 김대중후보의 정치역정 신용진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 기자: 김대중후보는 오늘 자연인 김대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지막 정치 직함이었던 국회의원의 허울까지 벗고 평범한 시민 김대중으로 돌아갔습니다.

    속세의 정치와 작별을 선언하는 순간 마포 당사를 흠뻑 적셨던 당원들의 눈물은 학견과 지조를 갖춘 노 정치인을 떠나보내는 안쓰러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이 의지할 큰 기둥을 잃은 슬픔이기도 했고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니지 하는 안타까움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3수가 좌절된 김대중, 수난의 정치인, 민주화의 화신으로 불리우는 그의 가시밭길은 64년 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면서부터 예고되었습니다.

    정부를 추궁하는 그의 논리는 매서웠으며 물 한 모금 안마시고 5시간 동안에 걸친 의사진행 강의 연설은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탄압의 표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1971년 7대 대통령후보 선출 과정에서 그는 40대 기수론을 재창한 김영삼 당선자와 함께 자유경선에 참여했으며 막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최연소 제1야당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양 김씨의 운명적인 사랑과 미움의 관계는 이때부터 출발합니다.

    유신선포 후 김영삼 당선자가 국내에서 반유신 투쟁을 벌이는 동안 그는 망명지에서 반독재 투쟁을 했으며 73년에 도쿄 납치사건으로부터 긴급조치 기간 동안 양 김은 민주화 투쟁의 동반자 관계로 협력하게 됩니다.

    80년 서울의 봄, 양 김은 저마다 대권 고지를 넘보며 두 번째의 숙명적인 대결을 벌이지만 군부의 등장으로 좌절됩니다.

    김대중씨는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언도 받은 뒤 자의반 타의반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가 85년 12대 총선 직전에 귀국해 김영삼씨와 함께 청명 야당 신민당이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양 김씨는 87년 대통령선거와 오늘 개표가 끝난 14대 대통령선거에서 각기 당을 달리해 독자 출마했고 오늘 김영삼씨는 당선자로, 김대중씨는 낙선자로 영역이 갈라졌고 김대중씨는 정치는 아쉬움이 있을 때 물러나는 것이 좋다는 짤막한 말로 정계은퇴의 소해를 피력했습니다.

    이제 그는 정치사의 산 증인으로 한국정치사를 저술하는데 남은 평생을 보낼 것입니다.

    그는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은퇴한 노 정치인 입장에서 희망과 꿈이 피어나는 정치를 설파할 것입니다.

    파란 많았던 40년 정치생활을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청산한 김대중, 그는 그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남겨두고 오늘 정치 전면에서 떠나갔습니다.

    MBC뉴스 신용진입니다.

    (신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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