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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진상,역사의 진실[정일윤]

5.18의 진상,역사의 진실[정일윤]
입력 1995-12-03 | 수정 199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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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진실]

    ● 앵커: 5.18의 진상은 은폐된 부분이 많습니다.

    자료의 빈곤 때문이기도 하고 진지한 관심의 부족 때문이기도 합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에서 펴냈던 사진 자료집을 통해서 5월의 진상을 다시보고 또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봅니다.

    정일윤 기자입니다.

    ● 기자: 이 사진, 80년 5월 광주를 상징하는 사진 속의 이 아이가 자라서 벌써 대학생이 됐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 대학생이 되기까지의 15년 세월이면 웬만한 상처 같으면 아물만도 한 기간 입니다.

    하지만 80년 5월 광주를 상징으로만 말하기엔 계엄군이 저지른 살육의 만행이 너무나도 잔인했습니다.

    세월이 치유하기엔 슬픔의 응어리가 너무 큽니다.

    80년 5월 17일 24시, 계엄군이 진주하기 전까지 전국 여느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광주에서도 계엄해제와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가 계속됐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를 포함해서 50여 명의 대학교수들이 앞장선 5월 16일 시위모습 입니다.

    5월 18일 작전명령 '화려한휴가'로 이름붙 여진 시위진압 작전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일변합니다.

    시내곳곳에서 계엄군의 무자비한 유혈진압이 계속됩니다.

    시위학생을 붙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 서너 명이 달려들어 군화발로 온몸을 짓니겼습니다.

    계엄군에 붙들리면 젊다는게 죄였고, 살기위해선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애걸해야 했습니다.

    시위진압 초기의 방송사에서 찍은 비디오 화면은 나중에 게엄당국이 압수해 가버려서 시민들이 몰래 몰래 가슴 졸이며 찍어둔 스틸사진 몇 조각만이 증거로 남아있습니다.

    계엄군이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발견된 시신들.

    차마 마주 바라보기엔 너무나도 끔찍한 이 모습에서 우리는 동물보다 하나도 낳을게 없는 인간의 수심에 전율합니다.

    이어 시민들의 분노는 화산처럼 폭발합니다.

    그리고 저항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총을 들어야 했습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한 직후 밤사이 쓰러져간 젊은 주검들이 흩어진 꽃잎처럼 처연합니다.

    그래도 분이 덜가신 듯 살기등등한 계엄군의 발길아래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저 젊은이의 표정, 삶의 안도와 죽음의 두려움이 함께 교차하는 저 모습이 어쩌면 5,6공 내내 숨죽이며 살아온 우리들의 자화상일런지도 모릅니다.

    MBC뉴스 정일윤입니다.

    (정일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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