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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동백림사건의 배경과 실체/김택환 당시 유학생 인터뷰[임영서]

1967년 동백림사건의 배경과 실체/김택환 당시 유학생 인터뷰[임영서]
입력 2006-01-26 | 수정 200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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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백림 사건, 정치 목적 악용]

    ● 앵커: 이렇게 대규모 간첩단사건으로 과장됐던 이 사건은 당시 박정희 정권의 정권연장 시도라고 하는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동백림 사건의 배경과실체를 임영서 기자가 보도합니다.

    ● 기자: 1967년 여름 전국은 시위로 들끓었습니다.

    장기집권을 구상하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 가능선인 의석의 3분의 2를 휩쓸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선거부정시비가 일었고 하루도 쉬지 않고 국민적인 항거가 이어졌습니다.

    선거부정규탄정국에서 갑자기 이응노, 윤이상 등 유명인사들이 포함된 사상 최대의 간첩단 사건이 발표됩니다.

    ● 대한뉴스 (1976년 7월 8일): 독일, 불란서(프랑스) 공부하는 유학생과 그곳에 가서 사는 사람을 평양으로 유인해서 세뇌공작을 마친 다음 우리나라 귀국시켜 대한민국 전복기도했다고 합니다.

    ● 기자: 동백림 즉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을 거점으로 예술인, 의사, 공무원, 학생 등 무려 194명이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북한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이 확인됐지만 대부분은 당시 다소 앞서있던 북한에 대한 호기심에 동베를린을 드나들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 김택환 (당시 유학생): 한국 학생이 모여서 우리 이거 따분하게 이게 뭐냐.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우리 동백림 가서 얻어먹자...

    ● 기자: 2명이 사형선고를 받는 등 재판은 무시무시하게 진행되다 조작시비와 독일과의 외교문제 등이 제기되면서 3년여 만에 피의자들 전원이 석방됐습니다.

    하지만 선거부정시위를 가라앉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이미 끝낸 다음이었습니다.

    ● 박번진 (당시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총무): 그 당시 공화당 정부가 부정선거 시비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상당히 고심을 했었습니다.

    ● 기자: 이듬해 1.21공비사건, 통역당사건이 잇따라 터지며 강화된 반공 구호 속에 69년 9월 삼선개헌안이 강행 처리됩니다.

    어렵던 시절 교포들의 호기심 때문에 빚어진 사건이 정권연장의 빌미로 악용됐음이 사건 발생 40년 만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MBC뉴스 임영서입니다.

    (임영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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