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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닝 이슈] '잊지 못할 그날' 광복 70주년, 전국 기념 행사

[이브닝 이슈] '잊지 못할 그날' 광복 70주년, 전국 기념 행사
입력 2015-08-13 18:10 | 수정 2015-08-1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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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 ▶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식]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날, 일본 제국주의에서 우리가 해방된 날. 8.15 1주년 기념일을 맞이해서 서울에서는 조미연합으로 기념행사가 (개최됐습니다.)"

    [김구 총리]
    "오늘은 우리 전 민족이 세계의 무대로 발을 들여 놓은, 그런 시기를 맞았습니다. 대한독립 만세! 만세! 만세!"

    "우리 민족을 기만하려고 세워놓은 저 충령탑을 깨끗하게 폭파해서…"

    "일본 제국주의 착취에서 해방된 조국, 이제 자주독립을 위해 돌진할 것을 맹세한 민중들은 이어서 대열을 갖추어 시가행진으로 옮겼습니다."

    [1946년 한글 반포 500주년 기념식]

    "세계의 자랑인 우리 한글, 그 반포 500주년 기념일인 10월 9일, 1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한 기념식이 거행되었습니다."

    ◀ 앵커 ▶

    지금 보신 화면은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한 1945년 이듬해에 만들어진 기록 영화인데요, 복원작업을 거쳐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됐습니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죠.

    35년간 이어진 일제의 압제에서 마침내 벗어난 1945년 8월 15일, 그날의 벅찬 감격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사진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유선경 아나운서가 전해드립니다.

    ◀ 유선경 아나운서 ▶

    [1945년 8월 15일 조국 해방]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그날, 시민들은 해방의 기쁨으로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는 조국 해방을 환호하는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고, 서대문 형무소 앞으로 몰려간 시민들은 감옥에서 풀려난 독립투사들과 함께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려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했습니다.

    어린 학생들도 거리로 나와 플래카드를 들고 광복을 기뻐했고, 광주 시가지에서도 8.15 해방 경축 퍼레이드가 펼쳐졌습니다.

    [일장기에 먹을 칠해…]

    일제 치하 35년 만에 맞은 광복.

    당시 태극기를 소지하는 건 불법이었는데요.

    해방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일장기에 검은 먹을 몇 겹씩 덧칠해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70년 전 8월 15일, 서울 남산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종로경찰서 앞 광장에서도 해방을 축하하는 시가행진이 벌어졌는데, 일장기 위에 흐리게 덧칠한 태극기의 모습이 보이시나요?

    목포역 앞에도 태극기 문양과 함께 독립만세 간판에 세워졌고요.

    일장기가 걸려있던 국민학교 건물과 교정에도 태극기가 걸렸고,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와 자랑스럽게 휘날렸습니다.

    [국권 회복, 우리말 우리글]

    해방은 8월 15일에 했지만, 공식적인 국권 회복은 9월 9일에 이뤄졌습니다.

    그 후 전국의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에서 다시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진은 9월 9일 아베 노부유키 조선 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 모습이고요,

    항복서명 이후 서울을 떠나는 일본군의 모습도 사진에 함께 담겨 있습니다.

    해방 후 약 한 달 뒤인 1945년 9월 24일, 전국에서 일제히 국민학교 교육이 시작돼, 빼앗겼던 우리 말과 우리 글이 35년 만에 책상 앞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 앵커 ▶

    정부가 내일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면서 내일부터 사흘 동안 연휴가 시작되죠.

    70주년을 맞은 광복절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데요.

    계속해서 유선경 아나운서가 알려드립니다.

    ◀ 유선경 아나운서 ▶

    1945년 8월 15일, 잔혹했던 일제 치하 35년이 지나고 대한민국은 꿈에 그리던 독립을 이뤘습니다.

    내일모레는 독립을 이룬 그날로부터 꼬박 70년이 되는 날인데요.

    하루 전날인 내일 오후 부산 남항에서는 당시 해방 귀국선의 감격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일제는 전쟁터는 물론, 군수업체와 군 위안소 등에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했었는데요.

    광복 이후 살아남은 이들은 이 귀국선을 타고 그리던 고향땅을 밟았습니다.

    시민 815명이 탑승한 해방 귀국선이 70년 전 그날처럼 부산항에 들어오면, 축포가 터지고, 민간 선박 70여 척의 해상 퍼레이드가 펼쳐질 예정입니다.

    살아 돌아온 동포에게 주먹밥을 나눠주고, 귀국 동포를 환영하는 태극기 물결과 거리 퍼레이드도 펼쳐질 예정입니다.

    내일과 모레 이틀 동안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대형 콘서트와 불꽃놀이도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데요.

    내일 오후에는 대구 수성유원지와 대전 엑스포 시민광장에서, 모레 광복절 당일에는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과 광주 월드컵 경기장, 풍암 호수공원에서 각각 K-POP 콘서트와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불꽃쇼가 펼쳐집니다.

    또 다음 주 화요일에는 (18일) 서울 여의도 공원에서, 70년 전 상해 임시정부 요인 15명이 귀국 당시 탑승했던 수송기 C-47기가 공개됩니다.

    당시 C-47기에 실제 탑승했던 한국광복군 윤경빈 선생도 현장에 참석해 70년 만에 다시 비행기에 올라 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라는데요.

    올해 96살이 되신 윤경빈 선생은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의 경호를 맡아 독립운동을 한 분입니다.

    ◀ 앵커 ▶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암살>이 요즘 관객몰이를 하고 있죠.

    어제까지 940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하는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광복절 70주년 당일인 내일모레, 천만 기록을 달성할 것으로 보입니다.

    영상 함께 보겠습니다.

    ◀ 리포트 ▶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이 어제 하루 동안 관객 16만 4천 명을 동원해 누적 관객 수 949만 3천 명을 기록했습니다.

    천만 관객까지 50만 명을 남긴 상태입니다.

    최근 평일과 휴일의 관객수 증감률을 따져봤을 때, 영화계는 영화 '암살'이 모레 70주년 광복절 당일 천만 관객을 달성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동훈 감독]
    "진짜로 하고 싶었던 얘기는 그 시대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암살'은 1930년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친일파로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의 신념을 쫓다가 맞닥뜨리게 되는 어떤 운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총독부를 폭파시키거나 종로경찰서를 폭파시키거나 그런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서 (만들었는데),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을 오랫동안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정재]
    "국가, 민족, 애국, 이런 단어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 그런 걸 일생생활 하면서 많이 생각하고 살지 못했었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 진짜 그때 당시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노고와 이런 것들을 정말 다시 생각하게 되죠."

    ◀ 앵커 ▶

    일제 시대 독립군의 얘기를 다룬 영화 '암살'을 본 관객들은 잊고 지냈던 광복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들어보시죠.

    ◀ 리포트 ▶

    [이민자]
    "아이들이 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보여주고 싶어서 같이 보게 됐어요. 광복절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 것 같아요."

    [안소현]
    "힘들게 독립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자랑스럽지만 또 그분들이 충분한 대우를 못 받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고…"

    [권성일]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분도 느끼셨을 테지만 그런 아픈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저희도 열심히 살고 또 그 시대를 살았던 존경 해야 될 분들에 대한 생각도 다시 한번 해보게 된 것 같습니다."

    [윤영은]
    "광복절이 빨간 날이고 단지 쉬는 날로만 알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독립,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저희가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다시 광복절에 대한 큰 의미를 다시 되새길 수 있어서 좋은 영화였던 것 같아요."

    ◀ 앵커 ▶

    영화 '암살'은 김구 선생과 함께 무력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김원봉 단장이 이끈 '의열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조선 총독 등 일제 주요 인사를 암살하고 폭탄을 투척하는 등 무력투쟁에 앞장섰던 의열단의 활약상에 다시 한 번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데요.

    영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리포트 ▶

    [영화 <암살> 中]
    "이 근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다던데."

    "가서 (김구) 선생께 전하시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의열단이 그 이름을 세상에 크게 드러낸 건 1921년 9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김원봉 단장이 계획한 이 의거를 계기로 식민 통치 체제가 안정되고 있다는 일본의 선전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김원봉]
    "조선이 독립하려면 2천만 민족의 8할 이상이 피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때 선두에 나아가 희생되는 것이 마땅하다."

    의열단은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 주요 시설을 파괴 대상으로, 일제 앞잡이들을 암살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항일 무장 독립운동단체 '의열단']
    "우리 조선인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항쟁할 것이다."

    평범한 시민, 평범한 가장에서 이름 없는 독립투사가 된 사람들.

    조선 독립의 희망이 사라져갈 때마다 의열단은 아직도 조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온 국민에게 각인시켰습니다.

    (직업이 무엇인가?)
    "나의 직업은 조선독립당원이오, 혁명사 사원이오."

    (독립운동의 이유가 무엇인가?)
    "일본에게 모욕을 당한 때에 분개한 것이오. 모욕당한 걸 생각하면 생명을 희생하여도 아깝지 않았소."

    (황궁에 폭탄을 던진 건 무엇 때문인가?)
    "침략정치에 도취되어 있는 왜국 관민을 각성시키고,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소"

    ◀ 앵커 ▶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젊음과 목숨을 기꺼이 바친 독립운동가 중에는 여성들도 많습니다.

    광복 70주년을 계기로 그동안 잊혀졌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데요.

    함께 보겟습니다.

    ◀ 리포트 ▶

    한발에 한 명씩 일본군을 저격하는 명사수, 영화 '암살'의 전지현은 독립군 저격수로 등장합니다.

    여성은 단순히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게 고작이었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무장 투장에 참여한 여성도 적지 않았습니다.

    실제 '여자 안중근'으로 불리는 남자현 여사는 주 만주국 일본 전권대사를 암살하려다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김희곤 교수]
    "독립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손가락 두 마디 자른 것을 (혈서와) 함께 넣어서 조사 단장에게 보냈지만…"

    1만 3천여 명의 독립 유공자 가운데 여성은 2백여 명, 이들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연락책으로 10여 년간 활동했던 정정화 여사는 무대 위에서 되살아났고, 서대문 형무소에는 여성독립운동가 266명의 이름을 내건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엄의식 서울시 복지정책과장]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발굴작업이 더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남자들 못지않게 치열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투쟁사가 새로 조명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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