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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닝 이슈] '민주화 선봉' 김영삼 前 대통령의 발자취

[이브닝 이슈] '민주화 선봉' 김영삼 前 대통령의 발자취
입력 2015-11-23 17:38 | 수정 2015-11-2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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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커 ▶

    오늘 이브닝 이슈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자세히 조명하겠습니다.

    어제 새벽 향년 88세의 나이로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난 2013년 뇌졸중으로 앓으며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함께 보겠습니다.

    ◀ 리포트 ▶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08년 첫 뇌졸중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통해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았을 때만 해도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2012년 막힌 심장 혈관 치료를 위해 스탠트 시술을 받은 데 이어, 2013년 다시 뇌졸중을 앓으며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19일 고열과 호흡곤란으로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 의식이 있었지만, 그제 오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면서 어제 새벽 0시 22분 결국 서거했습니다.

    [오병희/서울대학교병원장]
    "패혈증과 급성 스트레스가 겹쳤을 때 심장기능이 갑자기 악화돼 사망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7번째로 서거한 전직 대통령입니다.

    영결식은 목요일인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되며, 영결식이 끝난 뒤,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안장식이 엄수될 예정입니다.

    ◀ 앵커 ▶

    '거산'이란 호만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이번엔 거제의 섬 소년이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면서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리포트 ▶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27년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작은 어촌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중학생 시절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란붓글씨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꿈을 키웠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장택상 전 총리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국회 입성 뒤 3선 개헌에 반대하며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 창당 참여로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의 길을 걷게 됩니다.

    [14대 대선후보 연설(1992년)]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신과 권위주의에 맞서 싸우다 당한 초산테러.

    신군부 시절 가택연금에 이은 단식투쟁.

    군사정권을 향한 저항은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직선제 개헌 이후 첫 대선에서 패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았지만 3당 합당으로 돌파하는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습니다.

    [취임식 연설(1993년)]
    "저는 오로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저 나름대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왔습니다."

    ◀ 앵커 ▶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격동의 대한민국 정치사를 이끈 인물답게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습니다.

    최연소, 최다선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정치 역정 내내 함께 했는데요.

    이혜민 아나운서와 함께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 이혜민 아나운서 ▶

    [25]

    25세.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인 경남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정계에 입문한 지 3년 만의 일로, 만 25살.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입니다.

    [9선 국회의원]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1992년까지 무려 38년간, 아홉 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냈는데요.

    1980년대 정치활동이 금지됐던 11대, 12대를 제외하면 김종필 전 국무총리, 박준규 전 국회의장과 함께 최다선 기록입니다.

    [최연소]

    1965년엔 38살이라는 최연소 나이에 당시 야당인 민중당에서 지금의 원내대표격인 원내총무를 맡은 이래, 원내총무만 5번을 맡는 등 기록을 세웠습니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제창한 이후, 1974년엔 역시 47살 최연소 야당 총재에 올라, 야당 총재만 3번을 역임했습니다.

    [최초]

    김영삼 전 대통령은 유신에 저항하다 1979년엔 헌정사상 최초로 <제명>당한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외국 언론을 통해 당시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 철회를 요구한 것 때문에, 공화당과 유정회의 주도로 10분 만에 날치기 통과됐는데요.

    국회의원 제명은 현재까지도 유일한 사례입니다.

    1989년엔 소련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 정치인이라는 기록도 남겼습니다.

    ◀ 앵커 ▶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생전에 수많은 어록을 남겼습니다.

    굴곡진 한국 정치사의 결정적인 순간을 담고 있는 어록들인데요.

    영상으로 함께 보겠습니다.

    ◀ 리포트 ▶

    지난 1979년 유신 말기.

    유신에 저항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의원직에서 제명되자,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민주주의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토해냈습니다.

    [故 김영삼 전 대통령/2010년 김영삼 기록전시관 준공식]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마침내 왔습니다."

    유신 체제는 무너졌지만 이후 들어선 신군부 정권.

    군부 독재에 맞서면서 가택 연금을 당하고, 목숨 건 23일간 단식투쟁도 벌였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해외 출국 권유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故 김영삼 전 대통령]
    "날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이런 식으로 힘으로 막을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은, 마음은 전두환이가 뺏지는 못해."

    신념은 '정도를 가면 거리낄 게 없다'는 좌우명 '대도무문'에 잘 드러납니다.

    [故 김영삼 전 대통령]
    "누가 봐도 딱 정도로, 난 옆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정도로 간다. 이 길로 간다."

    지난 1990년 3당 합당 당시 야합과 변절이라는 비판에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며 정면 승부수로 돌파했습니다.

    짧고도 울림이 큰 김 전 대통령의 직설 화법.

    한국 정치사에 굴곡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남게 됐습니다.

    ◀ 앵커 ▶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성역 없는 사정과 중단 없는 개혁을 선언했었죠.

    그 외에도 금융 실명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임기 말엔 아들과 측근의 비리, 또 한국이 IMF 사태를 맞게 하는 등 오점도 남겼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 리포트 ▶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의 시대적인 과제로 성역 없는 사정, 중단 없는 개혁을 선언했습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2.12와 5.18 책임 규명과 전 정권의 부정축재 수사로 이어지면서,두 전직 대통령은 나란히 법정에 섰습니다.

    [故 김영삼 전 대통령(1996년 새해 국정연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아 미래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입니다."

    군사 정권의 잔재로 군내 최고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면서 군의 정치개입이 근절됐다는 역사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경제분야에서도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취임 첫해, 직접 TV 생방송을 통해 금융실명제 시행을 전격 발표해 검은 거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했습니다.

    [대통령 대국민담화/1993년 8월 12일]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

    2년 뒤엔 부동산 보유와 거래도 본인 실명으로만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우리 경제와 사회 전체의 투명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집권 초 평균 7%에 달하는 꾸준한 경제성장을 이끌어, 1996년엔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반열인 OECD에도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기 말에 터진 측근의 비리와 소통령으로 불리던 차남 현철씨의 구속은 문민정부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대국민담화/1997년 2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부실 대기업들의 잇따른 부도와, 급속한 자본시장 개방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대가는 IMF 사태를 불러왔습니다.

    [1997년 11월]
    "지금 우리 경제는 국제통화기금의 지원 금융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개혁과 과거사 정리라는 거침 없는 취임 초 성과들은 측근 관리, 위기관리 소홀로 빛이 바랬다는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 앵커 ▶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이른바 '양김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상도동계'로 불리는 계파정치의 거두이기도 했는데요.

    김 전 대통령에 의해 발탁된 정치인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김영삼의 사람들, 이혜민 아나운서가 전해드립니다.

    ◀ 이혜민 아나운서 ▶

    지금 보시는 이 화면은 지난해 7월, 새누리당 전당대회 당시의 모습입니다.

    이 날 김무성 의원이 신임 당 대표로 선출됐고, 서청원, 이인제, 김을동, 김태호 의원이 최고위원으로 뽑혔는데요.

    이 가운데, 김무성, 서청원 두 사람은 대표적인 '상도동계' 가신들이고요.

    이인제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통일민주당 연구소에서 일했고, 김태호 의원 역시 상도동 가신이었던 고 김동영 전 장관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결국 김을동 의원을 제외한 전원이 이른바 '상도동계'로 분류되거나,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셈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자택이 있던 '상도동'에서 이름을 딴 '상도동계'는 1969년 이후 군부 정권과 맞서 싸우던 야당의 전초기지였습니다.

    좌형우 우동영으로 불리던 최형우 전 장관과 고 김동영 전 장관을 비롯해 박관용 전 국회의장과 신상우 전 국회 부의장, 김덕룡 전 장관 등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상도동계의 또 다른 축은, 지난 1984년 김대중 전 대통령 측 동교동계와 함께 만든 '민주화추진협의회' 출신들인데요, 줄여서 '민추협'이라고 하죠.

    상도동계 막내라고 불리던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정병국 새누리당 의원이 바로 이때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상도동계는 아니지만,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정계에 진출한 정치인들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회창 전 총재는 김 전 대통령이 감사원장으로 영입했고, 이후 총리를 거치면서 '대쪽총리'의 이미지를 얻었습니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지난 1993년 보궐선거를 통해 민자당에 영입돼 2007년 한나라당 탈당 전까지 한배를 탔었고, 1996년 15대 총선 때는 정의화 국회의장, 홍준표 경남 지사, 운동권 출신이었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이재오 의원 등이 발탁됐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과도 남다른 인연이 있는데요.

    지난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영입해 부산에 출마시켰고, 1992년 14대 총선 때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국회의원 비례대표로 영입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았는데요, 고인에 대해 남긴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 리포트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저는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위대한 개혁 업적을 만드신 그런 불세출의 영웅이셨습니다."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제가 모시고 민주화 운동을 같이했습니다. 대한민국의 큰 별이 가셨습니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제가 그때 국회의원 나올 때 구호가 '대통령이 불렀다', '개혁 위해 나섰다' 저는 개혁에 한 힘을 보태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정치에 참여를 했습니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하나로 힘을 합쳐서 선진화, 세계화를 이룩하시는데 큰길을 트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앵커 ▶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역은 서울에 있는 국립현충원에 마련됩니다.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는데요.

    고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전에 있는 국립현충원에, 고 윤보선·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족의 뜻에 따라 충남 아산과 경남 봉하마을에 각각 묘역이 조성됐습니다.

    이번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역이 어느 위치에 어느 규모로 안장될지 알아보겠습니다. 함께 보시죠.

    ◀ 리포트 ▶

    현충원이 한눈에 내다보이고 햇볕이 잘 드는 국립서울현충원 제 3장군묘역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소가 이곳 우측 능선에 조성됩니다.

    현충원 입구에서 약 1km 정도 위쪽에 위치한 자리입니다.

    위쪽으로 3백 미터 거리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2백여 미터 앞쪽에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이 위아래로 자리 잡고 있는 곳입니다.

    묘역의 크기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비슷한 260여 제곱미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봉분과 제단 등은 국가원수 묘지 규정에 따라 설치될 예정입니다.

    ◀ 앵커 ▶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다른 전직 대통령들의 경우, 건강상태는 어떤지 관심이 쏠리는데요,
    함께 보겠습니다.

    ◀ 리포트 ▶

    생존해 있는 3명의 전직 대통령 가운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80대 고령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올해 84살로, 지난달 모교인 대구공고 총동창회 체육대회에도 참석하는 등 여전히 건강을 유지하며 대외 활동에도 큰 어려움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전 전 대통령과 육사 동기지만, 나이는 한 살 아래인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지난 2002년 전립선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건강이 악화돼 현재는 정상적인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올해 74살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최근 방한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와도 회동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초 자서전을 출간했고, 중국, 몽골, 베트남 등을 방문해 강연하며 '전직 정상 외교'에 힘 쏟는 등 활발히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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