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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재판에선…법원과 싸워야 하는 피해자들

현실 재판에선…법원과 싸워야 하는 피해자들
입력 2018-03-08 20:24 | 수정 2018-03-08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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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커 ▶

    이렇게 정부의 처벌 강화 대책이 나왔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진 않습니다.

    고통을 참아가며 법정 투쟁을 해야 하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재판 때는 오히려 재판부와 싸워야 하는 상황을 맞기도 합니다.

    법정에서 가해자에겐 관대하고, 피해자에겐 2차 피해를 입히는 일이 적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이 소식은 양효걸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 리포트 ▶

    새 직장으로 옮긴 지 1년, 최 모 씨는 상습적인 성희롱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속 상사는 최 씨가 "다른 남성 직원들과 성적으로 친밀하다" "출장 가서 현지 법인장과 놀아났다"며 헛소문을 퍼뜨리고, 심지어 "옷차림 등 행실을 조심하라"며 여성의 가슴 사진을 들이밀기도 했습니다.

    참다못한 최 씨는 회사에 알렸지만 회사 측이 오히려 퇴사를 종용했습니다.

    [최 모 씨/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회사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으면 성희롱 안 당하는 방법이 있는데 왜 성희롱을 당했냐, 한 번도 아니고…"

    고용노동부 진정을 해 '성희롱' 피해 사실을 인정받은 최 씨.

    가해자를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을 냈는데, 뜻밖에서도 법원에서 "성희롱이 아니"라고 결론이 뒤집어졌습니다.

    재판 내내 가해자 측은 최 씨가 업무능력이 떨어지고 남자관계가 복잡하다며 성희롱과 관계없는 인신공격으로 일관했습니다.

    [최 모 씨/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신고를 할 때는 제가 성희롱을 입증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소송 절차는 저에 대한 수치스러운 말들을 다투어 나가는 과정이었고…"

    그런데 재판부는 피해자의 사생활을 문제 삼는 가해자 측 동료들의 진술서를 모두 증거로 채택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해자가 최 씨에게 퍼뜨렸던 헛소문은 제3자한테 들은 말을 옮겼을 뿐이고, 여성의 가슴 사진을 보여준 것도 '상사로서 조심하라'는 의미여서 성희롱이 아니라고 해석했습니다.

    가해자 측의 주장을 사실상 그대로 받아들인 겁니다.

    [최 모 씨/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그 판단의 기저에는 '여자가 행실이 바르지 않아서 사회생활의 조언으로 이런 말을 했다'라는 가해자의 주장들이 거의 다 받아들여진 거예요."

    여성계에선 사법부가 성폭력에 대해 지나치게 남성 중심의 관점에서 법을 해석을 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피해자에겐 사건과 상관없는 사생활까지 들춰가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반면 가해자에겐 관대하다는 것.

    실제 현행법상 성희롱은 입증 책임이 여전히 피해자에게 있고, 성폭행의 경우도 물리적인 '폭행과 협박', 그리고 피해자가 '저항'을 했을 경우로 좁게 한정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성범죄가 크게 늘어났음에도 가해자가 벌금형 등을 받고 풀려난 비율은 두 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재판을 해도 '가해자를 벌할 수 없다'는 뿌리깊은 불신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송란희/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우리나라의) 사법제도는 '성폭력이라는 게 없다'라고 인식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해자에 대한 의심이 너무 심하다는 거예요."

    ◀ 기자 ▶

    "여성이 술을 마시고 성관계를 맺는 건 도덕적으로 문제"다, "남자친구가 여러 명이냐, 몇 명과 성관계를 했나" "여성의 성경험 여부에 따라 성폭력 대응 방식이 다르다" 이런 상식 이하의 물음들은 모두 최근 재판에서, 그것도 판사와 가해자 측 변호사의 입에서 나온 겁니다.

    한 시민단체가 3백 건이 넘는 성범죄 관련 재판을 분석했는데, 판사나 가해자 측이 피해자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을 드러내거나, 성범죄 원인을 아예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사례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사법부의 판단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가해자들의 전략은 더 정교해졌는데요.

    우선, 자신의 성폭력을 '인정'한 것으로 보일 만한 '사과'는 거부하고 봅니다.

    이후 '역고소 3종 세트'라 불리는 명예훼손, 무고, 민사상 손해배상으로 피해자를 고소해서 시간을 버는 겁니다.

    이 시간 동안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과거 행적과 경제 상태, 부정적인 평판을 수집하고, 이를 이용해 재판에서 이른바 '꽃뱀'으로 몰거나 아예 범죄 원인을 은근히 떠넘겨서, 재판부가 가해자를 선처하도록 만드는 전략을 쓰는 겁니다.

    ◀ 리포트 ▶

    정부가 오늘(8일) 권력형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법정 최고형을 상향 조정하는 등 법을 바꿔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지만, 사법부가 성범죄를 대하는 이런 인식과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공염불에 그칠 거란 우려가 높습니다.

    MBC뉴스 양효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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