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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만 흘려보냈던 '불신'의 30년…변곡점 오나

시간만 흘려보냈던 '불신'의 30년…변곡점 오나
입력 2019-02-27 20:00 | 수정 2019-02-27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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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커 ▶

    북핵 문제는 사실 갑자기 등장한 사안은 아니죠.

    북미 양국뿐 아니라, 여러나라가 참여를 해서 수많은 협상과 합의를 이뤄냈지만, 결과는 늘 제자리였습니다.

    그 기반에는 북한과 미국의 뿌리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는데요, 지난 30년 북핵 협상의 역사를 이호찬 기자가 되짚어 봤습니다.

    ◀ 리포트 ▶

    영변 핵시설이 국제사회에 알려진 건 30년 전인 1989년 9월.

    국제원자력기구 사찰 문제로 갈등을 빚자 북한은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 NPT를 전격 탈퇴합니다.

    1차 북핵 위기입니다.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

    북한과 미국이 맺은 첫 북핵 합의였습니다.

    북한은 핵을 동결하고, 대신 미국은 핵물질 추출이 어려운 경수형 원자로와 중유를 제공하는 것.

    순탄한 듯했던 비핵화 과정은 2000년 대 초 다시 좌초됐습니다.

    [조지 W 부시/당시 미국 대통령 (2002년 1월 국정연설)]
    "(북한, 이란, 이라크) 같은 나라들과 테러리스트들은 '악의 축'을 이루고…"

    2002년 미국은 우라늄 농축 문제를 제기했고, 북한은 우라늄 농축은 제네바 합의 대상이 아니라며, 핵 시설 재가동으로 맞섰습니다.

    2차 북핵 위기.

    2003년 6자 회담이 시작됐고, 2년 뒤, 9·19 공동성명이라는, 북핵 해결의 큰그림을 담은 포괄적 합의문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합의 직후 미국이 불법 자금을 이유로 BDA 은행의 북한 계좌를 동결하면서 합의는 바로 어그려졌습니다.

    다음해 북한은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춰 대포동 2호를 발사하고 급기야 1차 핵실험까지 강행합니다.

    [북한 1차 핵실험 발표 (2006년 10월)]
    "2006년 10월 9일 지하 핵시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6자회담이 재개되고 2007년 2·13, 10·3 합의가 잇따랐습니다.

    북한의 영변 냉각탑 폭파와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양측의 노력도 있었지만 북한의 핵시설 신고와 검증 문제가 다시 발목을 잡았습니다.

    김정은 집권 초기에도 오바마 정부와 합의를 이뤄냈지만, 그 직후 북한은 위성이라고 주장하며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강행했고, 미국은 제재를 강화했습니다.

    오바마 정부는 제재 압박을 통해 북한 스스로 변화하기를 기다리는 전략적 인내로 맞섰고, 2017년 말 북한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습니다.

    [임을출/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절대적으로 신뢰가 부족했던 거죠. (북한 입장에선) 미국이 자기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흔들려고 한다는 의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고…미국 입장에서 북한이 비밀리에 끊임없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고…"

    서로에 대한 불신의 골만 키웠던 30년, 북핵 협상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MBC뉴스 이호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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