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앵커 ▶
고 박원순 시장은 인권 변호사이자 1세대 시민 운동가로 이름을 알려오다 이젠 최장수 서울 시장, 유력한 대선 후보로 이력을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생의 마감은 갑작스럽고 비극적이었습니다.
이정은 기자가 보도합니다.
◀ 리포트 ▶
故 박원순 시장은 전설적인 인권변호사, 故 조영래 변호사와 한 길을 걸었습니다.
1980년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 등 시국사건.
1990년대엔 한국 최초의 '미투 사건'으로 불리는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성폭행·성추행뿐 아니라 성희롱도 불법'이란 사실이 사회에 각인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1998년 여성운동가상 시상식]
"(우 조교) 사건 공동 변호인단 박원순"
시민운동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1994년에는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했습니다.
시민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데 주력하던 박원순은 재벌과도 맞섰습니다.
주주들의 권리를 찾으려는 소액주주 운동은 작지만 끈질긴 재벌개혁의 시작이 됐습니다.
또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을 퇴출시키기 위한 총선 낙선운동을 이끌며 한국 시민운동사의 한획을 그었습니다.
[박원순/시장(2000년 1월 공천 반대명단 발표)]
"국회가 더 이상 소일거리라든지 그야말로 명예의 상징으로만, 사치품으로만 이렇게 쓸수는 없다는 생각을 확실히 했습니다."
2011년, 시민운동가는 정치의 길로 들어섭니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와 극적으로 단일화를 이뤄낸 서울시장 보궐선거.
지지율 5%로 시작한 박원순은 거대여당이었던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꺾었습니다.
[박원순/시장(2011년 10월 재·보궐 선거)]
"야당통합 시민후보 박원순은 오늘 이 자리에서 서울 시민의 승리를 엄숙히 선언합니다."
강북 균형발전, 제로페이 등 서민우선 정책은 서울시장 박원순의 역점 사업이었습니다.
특히 메르스 사태 당시 단호한 대처는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박원순/시장(2015년 6월 심야긴급브리핑)]
"서울시는 엄중한 상황에서 (중앙정부로부터) 정보를 공유받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 이후부터는 제가 직접 대책 본부장으로 진두지휘해 나가겠습니다."
서울시장으로서 여성인권과 성소수자 보호에도 앞장섰던 박원순 시장.
시비가 있을 수 없는 많은 업적과 함께 생의 끝자락, 성추행 의혹도 동시에 남긴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MBC뉴스 이정은입니다.
(영상편집: 정소민)
뉴스데스크
이정은
인권변호사에서 대권 후보까지…비극적 최후
인권변호사에서 대권 후보까지…비극적 최후
입력
2020-07-10 19:53
|
수정 2020-07-1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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