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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회용 컵처럼 버려졌습니다"

"우리는 일회용 컵처럼 버려졌습니다"
입력 2020-08-25 21:01 | 수정 2020-08-25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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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커 ▶

    휴대 전화 부품 공장에서 일하다 갑자기 시력을 잃은 청년들이 있습니다.

    치명적인 유독 물질, 메탄올에 장시간 노출된 탓인데요.

    사업주들은 그저 비용이 싸다는 이유로 이 위험한 물질을 쓰게 하면서도 위험성을 알려 주지도, 번듯한 보호 장구를 챙겨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회용 컵처럼 버려졌다"고 말하는 이들, 그런데 최근 법원이 이들이 시력을 잃게 된 건 백 퍼센트 사업주 탓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곽동건 기자가 보도합니다.

    ◀ 리포트 ▶

    3년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35차 유엔인권이사회.

    29살 청년 김영신 씨가 연단에 섰습니다.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 김 씨는 연설문을 담담하게 읽어내려갔습니다.

    [김영신/2017년 6월, 유엔인권이사회]
    "저는 여러분들의 휴대전화를 만들며 시력을 잃고 뇌 손상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일회용 컵처럼 사용되다가 버려졌습니다."

    2015년 1월, 27살이던 김 씨는 부천의 한 공장에 파견돼 일했습니다.

    김 씨가 담당한 건 알루미늄을 깎아서 스마트폰의 버튼을 만드는 공정.

    겨우 2주 남짓 일했을 즈음 김 씨는 갑자기 눈이 침침해지고 숨이 가빠지는 증상을 느꼈다고 하는데요.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시신경에 염증이 생겼고 끝내 오른쪽 눈 시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비슷한 시기, 인천의 다른 공장에서 동일한 업무에 투입됐던 전정훈 씨도 김 씨와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일을 한 지 4개월쯤 된 2016년 1월, 전 씨에게도 이상한 증상이 나타난 겁니다.

    [전정훈/('스트레이트' 18. 12. 9)]
    "오후쯤 되니까 몸이 몸살처럼 추워서 도저히 안 되겠다 그래서 조퇴하고, 근데 나오는데 도중에 갑자기 안 보이는 거예요. 동생 말로는 잠시 화장실에 쓰러져 있었다고 하고…"

    전 씨도 결국 양쪽 눈 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날벼락처럼 찾아온 실명, 공장에서 금속을 깎을 때 발생하는 열을 식히려고 썼던 '메탄올'이 화근이었습니다.

    메탄올은 들이마시거나 피부로 흡수되면 눈에 심한 자극을 줄 수 있고, 장기간 반복해서 노출되면 중추신경계와 시신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일으킵니다.

    이 때문에 메탄올을 다룰 땐 안전 장비를 철저히 갖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데요.

    그러나 이 두 청년은, 자신들이 수시로 뿌리던 물질이 메탄올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고,

    그걸 마시면 죽을 수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전정훈/('스트레이트' 18. 12. 9)]
    "보호 장비라고 해봤자 일회용 마스크? 그게 뭐 보호해야 될 필요성을 몰랐고 그 때 그 당시에는. 그냥 인체에는 아무 상관 없을 줄 알았죠"

    이렇게 인체에 치명적인 '메탄올'을 공장에서는 왜 굳이 써왔을까요.

    알고 보니, 단지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효과가 똑같은 메탄올 대신 에탄올을 쓰면 사람에게 아무 해가 없지만, 그 비용이 두 배 이상 든다는 겁니다.

    '메탄올 실명' 사고는 전 세계에서도 1960년대 이후론 아예 보고조차 된 적이 없는 후진적인 산업 재해라고 합니다.

    부끄럽게도 우리나라는 메탄올로 눈을 잃은 사람이 최근 5,6년새 7명이나 되고, 모두 2,30대 파견 노동자들이었는데요.

    이런 재해를 일으키고도 실형을 받은 사업주가 단 한 명도 없다는 현실에 피해자들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피해자 어머니/('스트레이트' 18. 12. 9)]
    "형사 재판 할 때,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더라고. 벌금도 1백만 원 밖에 안 내고, 뭐 '사람이 3명이나 죽어야 구속된다' 이런 식으로…"

    피해를 입은 김 씨와 전 씨는 사업주들의 책임을 직접 묻겠다며 지난 2016년 손해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그러나 사업주들은 이 재판에서조차 '피해자들에게도 과실이 있다'면서 책임을 70%로 깎아달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정우준/노동건강연대 활동가]
    "'네가 마신 거 아니냐, 네가 일부러 분사한 거 아니냐' 이런 식의 얘기들이 있었고, 여기서도 메탄올 사업주들이 계속해서 그런 얘기를 했었는데…"

    3년 9개월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최근 1심 재판부는 '사업주들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며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사업주들이 피해 노동자에게 각각 10억 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겁니다.

    재판부는 '사업주들이 제대로된 배기장치를 하고 보호구를 지급하기는커녕 노동자들에게 메탄올의 유해성조차 알려주지 않았다'고 지적했는데요.

    이는 노동자들에 대한 보호 의무를 저버린 '불법 행위'라고 못박았습니다.

    [정우준/노동건강연대 활동가]
    "현재 형사처벌이 워낙 낮기 때문에 사업주에게 상대적으로 민사적인 책임이라도 져서/산재 노동자를 좀 더 신경쓸 수 있는 사회문화가 좀 확산될 수 있지 않을까…"

    노동자의 목숨이나 신체와 맞바꾼 탐욕,

    당장 감옥엔 안 가더라도 금전 배상의 형식으로나마 일종의 '단죄'가 이뤄질 수 있다는 선례로 남은 겁니다.

    김 씨와 전 씨 말고도 다른 피해자들 3명이 비슷한 소송을 진행중인데요.

    노동자의 인격권을 '일회용 컵'처럼 취급한 사업주들이 잘못의 대가를 어떻게 치를 지 지켜보겠습니다.

    MBC뉴스 곽동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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