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앵커 ▶
정부가 4차산업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자주 이야기하는 게 '샌드박스'라는 제도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모래 놀이터'인데, 신생 기업들이 규제에 막혀 좌절하는 일이 없도록 일정 기간 규제를 풀어주고, 마치 모래 놀이를 하듯이 사업을 한번 해보라는 건데요.
그런데 실상을 보면 이런 취지를 잘 살린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신생 기업들 가슴에 대 못만 박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특히 이해관계가 복잡한 사업의 경우 정부가 그걸 조정 하는 게 아니라, 그 역할을 떠넘기는 경우까지 있다고 합니다.
김세진 기자가 심층 취재했습니다.
◀ 리포트 ▶
새벽 5시 반.
경기도 김포에 사는 김 모 씨가 차를 몰고 직장이 있는 판교로 출근합니다.
[김 모 씨/김포시 거주 회사원]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는 무조건 나와야 돼요. (출근에) 많이 걸릴 때는 한 2시간 20분?"
한 달 기름값만 30만 원 정도이다 보니, 카풀 생각이 간절합니다.
[김 모 씨/김포시 거주 회사원]
"일단은 기름값 같은 경우도 줄이고 싶어도, 아는 사람인데 돈 얼마 줄게요, 이렇게 말하는 것도 좀 힘든 거고…"
김 씨의 출근길을 따라가 보니, 인천과 김포에서 쏟아져나온 차량들이 새벽 6시도 안 돼 올림픽 대로를 가득 메웁니다.
이중 10대 중 8대가 나홀로 차량.
지난해 창업한 한 카풀 스타트업은 이런 점에 착안해 통근자용 카풀앱을 만들었습니다.
[박헌/카풀 스타트업 대표]
"80만의 나홀로 차량들을 매칭(연결)시킨다고 그러면 이동의 품질이 좋아지겠지만, 환경적으로도 CO2 발생량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거죠."
카풀앱을 만들면서 가장 신경 쓴 점은 택시업계와의 충돌을 피하는 것.
택시 승객을 빼앗는 일이 없도록, 도시 내가 아닌, 출퇴근 거리 10km 이상의 도시 간 원거리 통근자만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회적 대타협기구가 카풀 허용시간을 오전 7시부터 2시간, 오후 6시부터 2시간으로 정하는 바람에, 새벽 이동을 전제로 한 이 업체의 카풀앱은 사업이 불가능해진 겁니다.
업체 대표 박헌 씨는 지난 5월 정부에 카풀 허용 시간을 한시적으로 풀어달라며 규제 샌드박스 심사를 신청했습니다.
정부가 택시업계와 중재해 시간대를 풀어주면, 시범 서비스를 통해 원거리 카풀앱이 택시업계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걸 입증해 보이겠다는 거였습니다.
[박헌/카풀 스타트업 대표]
"아예 수수료 받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어차피 실증 특례의 목적에 맞게 실제로 현장에서 실증을 해보고 싶습니다."
통상 규제 샌드박스를 신청하면 한두 달이면 회의가 열리지만, 박 대표의 경우 별다른 이유 없이 5개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0월 열린 첫 회의에서 국토부 관계자가 꺼낸 말은 폐업이었습니다.
[박헌/카풀 스타트업 대표]
"절대로 열어드릴 수가 없으니 그냥 폐업을 하셨으면 좋겠다라고…"
회의에 참석한 민간위원들은 "충분히 논의해볼 만 한 사안"이라며 시범서비스 허가를 표결에 붙이자고 했지만, 국토부 관계자는 "이미 법으로 카풀 시간이 정해졌고, 택시업계의 반발이 뻔한데 왜 이런 사업을 하려 하느냐"며 회의 내내 사업을 접으라고 했다는 겁니다.
[박헌 대표/카풀 스타트업]
"(국토부는) '택시업체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라는 얘기였고, '이걸 열어준, 승인해준 국토부 앞에서도 집회하실 거고 과기부 앞에서도 집회하실 거고…'"
"(그런데) 택시는 반대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는 입장인 거죠. 왜냐하면 (저희 사업의) 실제적인 내용을 가지고 대화를 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겪은 건 박 대표만이 아닙니다.
남승미 씨는 지난해, 빈 택시를 이용한 소화물 배달 서비스 스타트업을 만들었습니다.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 승객이 줄어 고전하는 택시 기사들이 소화물 배달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한 걸 보고 시작한 사업으로, 택시기사 2천 명을 회원으로 받고 택시단체와 MOU도 맺었습니다.
하지만, 택시가 화물을 배달해도 되는지가 논란이 됐고, 그래서 지난해 규제 샌드박스 심사를 신청했습니다.
1년 반 만에 열린 첫 회의에서 남씨가 국토부 관계자로부터 들은 말은 허용해줄 수 없다는 것.
그러면서도 국토부 관계자는, 남 씨에게 "직접 퀵서비스와 용달업계를 설득해 오라"고 말했습니다.
[남승미/택시소화물 스타트업 대표]
"이제 용달과 퀵에서 반대를 하고 있으니 너희가 가서 좀, 잘 좀 '어떻게 생각하느냐' 좀 방향을 조금 서로 접점을 찾아서 자기네(국토부)한테 좀 알려 달라…"
안 될 걸 알면서도 남 씨는 퀵서비스 업계를 설득하고 다녔고…그러는 사이 6명이던 직원은 절반으로 줄고 약속했던 투자도 사라졌습니다.
[남승미/택시소화물 스타트업 대표]
"그냥 미루기 식인 거죠. 어차피 저희가 가도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고…"
정부가 규제 샌드박스 도입 후 승인해준 사업은 모두 364개.
신청 사업 가운데 72%로 승인률이 꽤 높은 편입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유독 기존 업자들과의 충돌이 예상되는 골치 아픈 사업의 경우, 담당 공무원들이 회의를 마냥 미루거나, 아예 시도조차 못 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갈등에 휘말릴 일은 피하고 본다는 겁니다.
[정미나/코리아스타트업포럼 실장]
"이해관계 충돌이 막 실제로 벌어졌다기보다는 그 관계부처가 이해관계 충돌을 우려하여 지연시키거나…예를 들면 계속 승인을 안 하는 방식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내거나 이건 샌드박스 목적에 역행하는…"
문제는 또 있습니다.
빈 택시를 이용한 소화물 배달 서비스는 정부 창업진흥원이 경쟁력이 있다며 자금지원까지 해줬지만, 국토교통부는 반대했습니다.
남승미 씨의 경우 담당자가 1년 반 동안 4번이나 바뀌어, 매번 담당자를 설득하는 과정을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남승미/택시소화물 스타트업 대표]
"과기부에서도 너무 좋다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제 와서 '이게 과연 정말 신사업이냐?'라고 물어보면 제가 뭐라고 얘기를 해야 되느냐…"
전문가들은 신산업이라는 게 필연적으로 기존 산업과 충돌할 수 밖에 없는 만큼, 정부가 중재 역할을 외면한 채 피하기만 한다면 4차산업 혁신이 가능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윤병준/서울대학교 교수·샌드박스 민간위원]
"지금 다른 나라들이 하고 있는 사업을 다 못하고 있는 거죠. 정부가 아직도 도와주는 기관이라기보다는 그런 힘을 가진 기관이라는 생각이 많아요. 아직도 저는 군림하는 기관이라는 생각이 있지 않은가…"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지금처럼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운영한다면, 이해관계가 첨예한 스타트업들은 결국 고사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남승미/택시소화물 스타트업 대표]
"샌드박스라고 해서 되게 자유롭게 좀 '이 안에서 놀 수 있게 해 줘'라고 해서 스타트업들은 굉장히 희망을 갖고 들어가게 되는데요. 막상 들어가고 보니까 이제 더 힘들어지는 모래구덩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
MBC뉴스 김세진입니다.
(영상취재: 권혁용, 전승현, 김백승 / 영상편집: 김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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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12-07 20:59
|
수정 2020-12-0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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