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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를 각오했었지만"…생존 시민군의 한 많은 '40년'

"죽기를 각오했었지만"…생존 시민군의 한 많은 '40년'
입력 2020-05-19 06:41 | 수정 2020-05-19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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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커 ▶

    공수부대가 진입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40년 전 새벽 전남도청에는 시민군 백여 명이 끝까지 남았습니다.

    김철원 기자가 당시 생포됐다가 살아남은 시민군 한 분을 만났습니다.

    ◀ 리포트 ▶

    계엄군이 작전을 개시한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20살 시민군 박천만 씨는 전남도청 민원실 2층 바닥,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가 계엄군 총탄에 맞아 숨진 바로 그 옆자리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계엄군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전남도청에 남았습니다.

    [박천만(60세)/5·18 시민군]
    "'내일 계엄군들이 오면 죽을 수도 있다. 살고 싶으면 가시라' (누군가 말했습니다.) 아기 엄마가 생각났어요. 그때 당시에 (임신해서) 배가 이렇게 불렀어요."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총을 난사하는 것에 분노해 총을 들었다고 했지만, 본인은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박천만(60세)/5·18 시민군]
    "쏘면 분명히 (계엄군을) 맞힐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그분을 안 쐈어요. 나는 죽기로 한 사람이니까 나는 죽자…"

    박 씨는 계엄군에 붙잡혀 구타를 당해 고막이 터지고 온몸에 상처를 입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가 더 괴로웠고, 그렇게 한 많은 40년이 흘렀습니다.

    [박천만(60세)/5·18 시민군]
    "생계를 어떻게든지 해결해나가려고 하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돼요? 왜냐하면 사람이 두려운 거예요. 보면 피하게 되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자살도 생각했어요."

    광주가 한국의 민주주의의 등대로 자리 잡게 된 데는 80년 5월,

    자신이 끝까지 전남도청에 남았기 때문이라는 자부심이 이제야 생겼지만,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생존 시민군은 모든 공을 그날의 광주시민들에게 돌렸습니다.

    [박천만(60세)/5·18 시민군]
    "광주 시민들에게 진짜 큰 박수를 보내야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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