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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비극의 시작…'포로 교환' 미공개 영상

또 다른 비극의 시작…'포로 교환' 미공개 영상
입력 2020-06-26 06:36 | 수정 2020-06-2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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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커 ▶

    한국전쟁은 우리 역사의 가장 큰 비극과 동시에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강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요.

    MBC가 전쟁포로와 관련된 단독영상을 입수했습니다.

    김미희 기자입니다.

    ◀ 리포트 ▶

    1953년, 휴전협정과 함께 포로교환이 시작됐습니다.

    포성은 멎었지만 판문점에선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판문점 남북 양쪽에는 자신들의 승리를 선언하는 개선문이 경쟁하듯 세워졌습니다.

    남측에서 지급받은 옷과 신발을 내던지는 북한 포로들.

    고향으로 가며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마치 무엇을 증명이라도 하듯 격렬하게 구호를 외쳤습니다.

    북에서 내려오는 국군포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군가를 힘차게 부르는 국군포로 역시 북에서 받은 옷을 모두 벗어던졌습니다.

    자신들이 포로로 잡혔지만 변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전갑생/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남북한 모두가 그렇게 했어요. 적으로부터 받은 옷이니까 벗어던지는...국군 귀환 포로들이 판문점에서 혈서를 쓰면서 '대한 남아 돌아왔다'라고 직접 자기를 증명하는 방식이 하나가 있고..."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1년만에 사실상 끝났습니다.

    정전협정의 발목을 잡는 건 포로였습니다.

    남북 양측이 제출한 교환 명단은 북한군 포로 13만명과, 유엔군 포로 1만 1천명.

    이 숫자를 두고 양측은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여기에다 이승만 정권이 2만 7천명의 이른바 반공포로를 풀어주면서 북한의 김일성 정권 역시 보복으로 국군포로 송환을 거부한 겁니다.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 된 한반도에서 포로는 버려진 존재였고, 이후 '자기증명'은 남과 북을 지배한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강성현/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장]
    "자기 증명을 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반드시 어딘가를 택해야 된다. 자기 머릿속까지 마음까지 다 까서 보여줘야되는 경험을 사실 한국전쟁을 통해서 했던 것이고..."

    남북이 모두 존재를 부정했던 국군포로는 이후 50여 년이 지나서야 인정됐습니다.

    [리종혁(가명 91살)/ 미송환 국군포로 2006년 탈북]
    "막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단 말이야. 보복으로 국군포로 10만 명이 못 돌아왔다...그렇게 정치를 했어. 북한에 사람이 살아있는데 전사처리를 했잖아 7만명을..."

    포로 숫자와 송환 방식을 놓고 협상은 결렬과 재개를 반복했고, 1년 8개월의 지리한 협상이 이뤄지는 사이 남북에서는 포로의 10배가 넘는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MBC뉴스 김미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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