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앵커 ▶
한 동네 약사가 지적 장애가 있는 50대 노숙인에게 방도 구해주고, 장애인 등록도 해줬습니다.
이 약사 덕분에 노숙인은 처음으로 이웃이 생기고 지원금도 받을 수 있게 됐는데요.
그런데 약사는 개인적인 선행으로 알려지는 건 원하지 않는다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지윤수 기자가 전해드리겠습니다.
◀ 리포트 ▶
큰길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골목과 골목이 만나는 모퉁이에 약국이 있습니다.
[최윤혜/약사]
"너무 오랜만인데? 왜 이렇게 오랜만이에요. <약사님, 나 약 지어간 게 뭔 약인지 몰라서 못 먹는다?>"
약사 최윤혜 씨가 35년째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킵니다.
"아버지 운동 좀 시켜드리라고요."
지난해 봄, 이 골목에 누추한 차림의 50대 노숙인 한 명이 나타났습니다.
약국 창문 너머로, 그 남성은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리어카를 끌고 폐지와 박스를 모았습니다.
[최윤혜/약사]
"너무 예쁜 거예요, 살려고 하는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자립해서 살아가려는 희망이 있구나…"
55살이지만 9살 수준의 지능에, 귀도 잘 안 들리는 최재만 씨.
"점심 먹었어요? <예.> 무거운 걸 많이 주워왔어요? 누가 이렇게 좋은 걸 줬어요? <내가 주워왔어요.> 어디서?"
서울역에서 노숙하다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재만 씨는, 주소지가 용산구로 돼 있어 종로구 창신1동 주민센터에선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약사는 일단, 쪽방 한 칸을 얻어 전입신고부터 해줬습니다.
[최윤혜/약사]
"손님 중에 길 건너 쪽방촌 운영하시는 사장님이 (있어서), 월세 25만 원짜리 여기서 계약서 써 가지고…"
창신동 주민이 되자 월세 25만 원과 생필품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약사는 지원금을 받을 통장도 만들어줬는데, 이 과정에서 재만 씨가 한 통신사 대리점에서 사기까지 당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최재만 씨) 사인을 자기들(대리점 직원들)이 위조했어요. 서울역 노숙자 시절에 (주민등록증을) 도난당했대요. (최 씨) 글씨가 아니잖아요, 아예."
결합상품이 13개나 가입돼 사용료가 5백만 원 넘게 밀려있었는데, 혜화경찰서에서 고소장을 직접 써준 덕분에 150만 원은 돌려받았습니다.
가장 필요한 '장애인 등록'은 산 넘어 산이었습니다.
'장애 진단서'를 포함해 각종 서류를 준비해 냈지만, 국민연금공단은 "선천적인 장애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다"며 보완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재만 씨는 가족이 없어 과거 자료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약사 최 씨가 재만 씨에게 물어물어 일생을 직접 글로 정리하고, 주민센터도 관련 자료를 보충해 제출하고서야 장애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방법을 알아보는데 석 달, 신청한 지 석 달, 꼬박 6개월이 걸렸습니다.
[최윤혜/약사]
"저런 분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나라에서 요구하는 자료도 엄청 많아가지고…"
국내 장애인구 중에 재만 씨처럼 장애등록을 하지 못해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전체의 약 5%, 무려 12만 명이 넘을 걸로 추정됩니다.
등록을 못 한 이유는 '절차와 방법을 몰라서'가 31%로 가장 많았고, 17%는 '등록과정이 번거로워서'라고 답했습니다.
창신동에 자리 잡은 지 1년, 이젠 재만 씨에게도 이웃이 생겼습니다.
"<약사님 좋아요?> 네. 잘해주니까 좋죠."
[최윤혜/약사]
"지금은 동네 주민들도 아시고 신문, 책 같은 거, 폐지 많이들 갖다주세요. '박스 사장님'이라고 불러요."
[하지연/창신1동주민센터 주무관]
"그나마 (쪽방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포착이 될 수 있었던 것 같고. 약사님을 안 만났으면 힘들었고. 운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슬프지만…"
재만 씨처럼 운이 좋지 않아도 보다 적극적인 행정으로 소외되는 이들이 없기를 바란다는 게 창신동 약사의 부탁이었습니다.
MBC 뉴스 지윤수입니다.
영상취재: 김희건 강종수 김우람 / 영상편집: 유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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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
지윤수
창신동 노숙인 재만 씨는 '박스 사장님' 됐지만‥미등록 장애인 아직 12만 명
창신동 노숙인 재만 씨는 '박스 사장님' 됐지만‥미등록 장애인 아직 12만 명
입력
2022-01-11 20:43
|
수정 2022-01-11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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