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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그려도 잘 했수다" 제주 '할망'들의 그림수업

"못 그려도 잘 했수다" 제주 '할망'들의 그림수업
입력 2023-08-20 20:19 | 수정 2023-08-20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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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커 ▶

    붓을 든 지 이제 1년 남짓 지난 초보 화가들의 그림입니다.

    소박하지만, 진솔함이 느껴지는데요.

    평균 나이 여든일곱, 제주의 작은 마을 할머니들이 그림에 푹 빠져 마을 전체를 미술관으로 바꿔놓았다고 하는데요.

    주말에 전하는 <문화앤톡>, 임소정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 리포트 ▶

    홍태옥 할머니가 걸음을 재촉합니다.

    김인자 할머니도, 강희선 할머니도, 지팡이와 유모차를 잡고 나섰는데요.

    도착한 곳은 마을 어귀에 있는 동네 체육관.

    저마다 이젤 앞에 자리를 잡습니다.

    "오늘 그림이 막 좋아. (막 좋아? 하하)"

    선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해서 '선흘'이란 이름이 붙은 곳.

    한 집 건너 한 집, 할머니들이 홀로 살던 제주도 작은 마을에 서울의 '그림 선생'이 이사를 왔습니다.

    [강희선/87세]
    "그림을 그리라고 하니 우리 연필도 심을 줄(잡을 줄) 모른데(모르는데) 허난(했는데) 너무 심심하는디(심심한데) 자미있지요(재미있지요)."

    1년 3개월째.

    학생 하나로 시작해 15명이 됐습니다.

    최연소가 1940년생, 최고령은 1930년생.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먹고사느라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평균 87세 '할망'들이 호미를 놓고 붓을 들었습니다.

    [홍태옥/87세]
    "그자(그저) 잘 그렸든 못 그렸든 잘했수다 잘했수다 해노난(잘했다 잘했다 하니까) 그림이 늘어."

    모든 것이 그림감.

    잠이 오지 않는 밤, 달력 종이엔 보고 싶은 손주 얼굴을 그렸고, 상처투성이 고목은 화폭에서 금빛으로 피워냈습니다.

    처음 배운 글자도 한 자씩 적어 넣었습니다.

    "상처난 것도 버리지 마라. 어떤 것은 상처도 나고 어떤 것은 곱게 자란다. 맛은 같다."

    "그림은 잘 못 그리면 다시 그리면 되고 공부는 늙어도 해야 한다."

    누구에게도 표현 못 한 마음속 이야기를 텅 빈 백지에 쏟아놓으며, 할머니들은 난생처음 '해방감'을 느꼈다고 하시는데요.

    집마다 빈 창고가 전시관으로 바뀔 만큼 차곡히 쌓인 그림들.

    우연히 찾았던 마을에 터를 잡고 그림을 가르치게 된 선생은 혼자 보기 아까워 책으로 펴냈습니다.

    [최소연/<할머니의 그림 수업>저자]
    "이 여성들이 스스로 해방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사실 스스로 해방된 건 저인 것 같아요."

    그 책의 서문을 쓴 한 인류학자는 이런 문장을 보탰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로 삶을 마감할 권리가 있다.'

    MBC뉴스 임소정입니다.

    영상취재: 김희건 / 영상편집: 김하은 / 그래픽: 조한결·이미예·조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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