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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거진2580

"영어과외를 금하라"

"영어과외를 금하라"
입력 2013-09-30 09:49 | 수정 2013-09-3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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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

    유아 전문 영어 학원을 찾아갔습니다.

    서너 살 밖에 안 되는 꼬맹이들이 외국인 선생님과 영어로 공부합니다.

    (Does he have a tail?)No!
    (Everybody says gorilla) Gorilla!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음악, 체육은 물론 예절 교육과 요리까지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합니다.

    정작 대만어 수업은 선택 사항입니다.

    한국의 유아 대상 영어학원, 이른바 '영어유치원'과 흡사합니다.

    5개 반 80여 명인데 31개월된 영아도 다니고 있습니다.

    비용은 한 달에 약 2만 타이완 달러, 우리 돈으로는 73만원.

    공립 유치원에 비해 5배 넘게 비싸지만 학부모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SYN▶ 란티엔펑/영어유치원 원장
    “(부모들은) 아이들이 체계적인 기관에서 영어 교육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일반 유치원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건 뭐예요?) Pencil.

    5살 딸을 둔 리총잉 씨도 유치원을 고른 첫 번째 기준이 실력 있는 원어민 영어 강사였습니다.

    ◀SYN▶ 리총잉/유치원생 부모
    “지금 다니는 유치원은 영어 선생님들이 주로 원어민이어서 선택했습니다. 아이가 아직 외국인과 대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국인이 있는 환경에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보신 것처럼 이곳 대만에서도 코흘리개 때부터 영어 공부를 시작합니다. 한국만큼이나 교육열이 높기 때문인데요,

    최근 대만 정부는 유아 사교육과 관련해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영어를 비롯한 학원 수업이 암기식일 경우에는 법으로 전면 금지한다는 겁니다."

    ◀SYN▶ 대만뉴스채널(TVBS)/2013년 8월 30일
    “(교육부가) 만 6세 이하(취학 전) 어린이는 주산, 암산, 영어, 작문, 속독 등 학원에 다녀서는 안 된다는 개정안을 공포했습니다.”

    개정안은, 학원에서는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들에게 '신체율동' 이나 '예술재능'만 가르칠 수 있다고 못 박았습니다.

    영어의 경우 가르칠 수는 있는데, 노래나 율동, 게임 같은 '놀이식'만 가능하지 단어를 쓰거나 문장을 외우게 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말은 복잡하지만, 한마디로 유아들에게는 영어 공부를 강요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SYN▶ 숑종화/교육부 평생교육국 국장(2013년 8월 30일)
    “(언어는) 단순하게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암기하는 방법이나 쓰는 방법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암산, 속독, 작문 같은 수업도 금지했습니다.

    과도한 조기 교육이 아이들의 건강한 정서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대만 교육부의 설명입니다.

    위반하다 적발된 학원은 최고 50만 대만달러, 우리 돈 약 1천 8백만 원의 벌금을 내야합니다.

    이 개정안은 현재 우리나라 국회에 해당하는 대만 입법원에서 심의 중입니다.

    부모들의 생각은 어떨까.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6살 지우첸위.

    ◀SYN▶
    “This is a gorilla.”

    3년 째 하루에 반나절씩 영어를 배우는 사립유치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SYN▶ 지우첸위(6세)
    “(영어 좋아하니?) 좋아해요.”

    맞벌이인 이 집의 월수입은 10만 대만 달러, 365만원인데 매달 61만원이 유치원비로 나갑니다.

    부담스런 금액이지만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SYN▶ 첸츠웨이/유치원생 부모
    “아이가 출발선에서부터 앞서 나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보냅니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기를 바라는 거죠.”

    대만은 유치원의 경우에는 이미 10년 전부터 정부가 법으로 암기식 영어 교육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치원이 법과는 상관없이 읽고 쓰기를 포함해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추가로 영어 학원을 규제한다 해도 큰 효과는 없을 거라는게 첸츠웨이 씨의 생각입니다.

    ◀SYN▶ 첸츠웨이/유치원생 부모
    “부모들이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고 싶어 하는 욕구를 없앨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들은 계속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어떤 방식으로든) 사교육을 시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디까지가 '놀이식'이고, 어디까지가 '암기식'인지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애매해 제대로 단속이 되겠냐는 의견도 많습니다.

    그래서 단속을 해야 할 자치단체도 난감해합니다.

    ◀SYN▶ 리후이밍/타이베이시 교육국 유아교육과장
    “조사하고 (합법과 불법을) 구분하는 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나 전문가들은 아예 6세 이하 어린이는 무조건 학원을 다닐 수 없게 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냐고 할 정도입니다.”

    학원업계는 물론 반발하고 있습니다.

    정부 방침대로 춤과 노래만으로 영어를 가르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SYN▶ 장하오란/타이베이시 학원연합회 사무총장
    “우리도 6세 이하 아이들에게는 생활 영어 중심으로 가르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학원에서 배운 뒤에 알파벳도 모르면 부모들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들은 법안의 국회통과를 막기 위해 집단행동도 불사한다는 계획입니다.

    대만 정부가 유아에 대해 영어를 비롯한 사교육을 금지시키려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비슷한 정책을 몇 년 전부터 수차례 추진했지만 학원과 일부 학부모들의 반발에 부딪혀 번번이 무산됐습니다.

    2년 전에도 6세 이하 아이들은 무조건 학원 과외를 해선 안 된다는 법안을 만들려다 실패했습니다.

    ◀SYN▶ 대만공공방송(PTS)/2011년 11월 3일
    “며칠 전 교육부가 영어, 주산 등 학원의 6세 이하 학생 모집을 금지하는 개정안을 마련했다는 보도가 나온 뒤 학원과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그러자 교육부 관계자는 즐겁게 공부한다면 유아가 영어를 공부해도 된다고 말을 번복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우선 '암기식'이라도 금지하자는 타협안을 내놓은 겁니다.

    이 때문인지 대만 교육부는 이번 사안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취재진의 공식 인터뷰 요청도 거절했습니다.

    ◀SYN▶ 대만 교육부 관계자/전화 녹취
    “아직 법안이 통과되기 전이어서 설명을 해드릴 수 없습니다. 이 방침은 국내외 언론에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언론도 저희 보도 자료만 가지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조기 사교육 금지 법안을 지지하는 의견도 상당히 많은 것이 현지 분위기 입니다.

    정부가 2005년부터 10년 가까이 조기 사교육 척결 의지를 일관되게 보이면서, 국민들 사이에 기본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겁니다.

    ◀SYN▶ 셰진슈
    “대만 어린이들은 너무 피곤합니다. 정부가 법으로 (사교육을) 막는 것을 찬성합니다.”

    갈수록 거세지는 조기 사교육 열풍을 막으려면 정부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게 학계나 시민단체의 의견입니다.

    ◀SYN▶ 황윈쉔/아동복지연맹 사무국장
    “정부가 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민간이 하기에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정상적인 생활과 학습을 하기를 바라는 부모들도 많기 때문에 이번엔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대만 역시 한국처럼 지나친 교육비 부담 때문에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

    사회양극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조기 사교육이 근절돼야 한다는 게 규제를 찬성하는 이들의 논리입니다.

    ◀SYN▶ 수멍췬/국립정치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사회정의 실현의 문제입니다. 돈 많은 사람만 비싼 유아 교육기관에 다닐 수 있지 않습니까? 정부가 이런 기본적인 요구를 해결해야 합니다.”

    아이들 영어공부를 둘러싼 대만의 풍경, 우리나라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도 유아들에 대한 영어 과외를 금지시킨다면, 가능할까요?

    유아 대상 영어 학원, 이른바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7살 서희.

    ◀SYN▶
    (친구들을 보고 카드에 적힌 단어를 말해보세요.) A red net.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2시 반까지 영어로 수업을 받습니다.

    수학과 과학, 체육까지 모두 영어로 배웁니다.

    영어 유치원이 끝나면 곧바로 피아노와 미술학원을 갔다가 저녁 6시에 집에 돌아옵니다.

    유치원 숙제에 엄마가 내준 단어 쓰기까지 하고 나면 밤 10시가 넘어 잠자리에 듭니다.

    서희 엄마에게 대만처럼 영어 과외를 금지시키면 어떨지 물어봤습니다.

    ◀SYN▶ 조윤미(유치원생 부모)
    “왜 그런 법이 발안이 됐는지까지는 이해가 좀 돼요. 하지만 어떤 획일적인 것보다는 자율에 맡기는 게 낫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고요. 일일이 검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어 교육 열풍은 이미 일반 유치원까지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서울 강북의 한 유아 대상 영어 학원.

    오전 11시30분.

    아침 9시부터 수업을 받은 아이들이 버스에 오릅니다.

    그런데 버스를 뒤따라가 봤더니 내리는 곳이 뜻밖에도 차로 3분 거리의 한 사립유치원입니다.

    유치원생들이 오전에 어학원에서 영어 수업을 받고나서 유치원에 오도록 연계를 시켜놓은 겁니다.

    ◀SYN▶ 유치원 관계자
    “아카데미(영어 학원)에서 이제 수업을 하고서 그리고 유치원으로 넘어와서 기본 교육과정을 하는데..”

    이 유치원과 어학원의 운영자는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SYN▶ 어학원 관계자
    “(여기 학원이랑 유치원이랑 원장님이 같은 분이신 거예요?) 네. 원장님이 같은 유치원, 아카데미 (운영하세요)”

    원생들은 유치원비 외에 어학원에 33만원을 매달 더 냅니다.

    운영자는 아이들이 어학원을 추가로 다녀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SYN▶ '유치원-어학원' 운영자
    “기본적으로 애들이 영어를 어느 정도 하려면 40분짜리 두 타임 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적어도 아이들이 영어를 좀 읽고 해야 되겠다 하면 기본 교육 중에 기본이에요.”

    지금 이 유치원엔 빈자리가 없습니다.

    이런 편법 운영까지 등장한 건 우리 부모들이 그만큼 유아 때부터 많은 교육을 원하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한국과 대만, 일본, 중국 네 나라 유아 사교육 실태를 조사한 결과, 한국은 특히 국영수 과목의 비중이 압도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대만과 중국은 미술, 일본은 수영을 가장 많이 시키는 등 다른 나라는 그래도 예체능 사교육이 더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이젠 어떤 방식으로든 대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SYN▶ 이기숙/이화여대 유아교육학과 교수
    “대만이 2005년부터 시작을 해서 지금 2013년, 정말 8년이라는 시간을 걸려서/결국은 법까지 가게 됐다는 것을 볼 때 정부의 노력이나 사회적인 움직임이 있지 않으면 우리도 그럴 정도(법제화)까지 가야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가 아이를 교육시킬 권리만큼 아이들이 스스로 행복할 권리도 존중돼야 한다는 겁니다.

    ◀SYN▶ 안상진/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부소장
    "아이들의 행복추구권이나 건강권의 측면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무한 경쟁하는 부분들을 좀 막아야 될 부분이 필요합니다."

    아이 때만큼은 원 없이 놀게 해주고 싶은 마음.

    하지만 그러다 내 아이만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이 두 가지가 충돌하는 지점이 바로 영어 조기교육 열풍이고,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대만은 규제를 선택했습니다.

    대만의 실험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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